긴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렸다.
비 내리는 현충일, 마음 차분해지는 아침이다.
동작동으로 참배가기로 한 날이다.
어제 통화했던 아버지의 음성이 부쩍 힘없어 보였다.
기력이 부쳐 당신은 못 갈 것 같다고
무척 아쉬워하셨다.
애써 밝은 목소리로 그럼 저 혼자 다녀올 테니
얼른 기운 차리시라며 통화를 마쳤다.
남양주에서 동작동 현충원까지 짧지 않은 거리를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며 해마다 다녀가셨는데
이젠 건강이 허락지 않아 그마저도 버거우신가보다.
TV로 추모식 중계를 시청한 후 집을 나섰다.
그 사이 내리던 비는 그치고 날이 청명해졌다.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적함을 떨친다.
일 년에 한번 추모객들로 북적이는 동작역
국립현충원 방향 4번 출구
현수막을 크게 붙여 이정표를 대신했다.
사람들에 섞여 육교를 건너는 동안 마음 뭉클해진다.
메모리얼 데이, 현충일
순국의 영령들을 기억하는 날이다.
일 년에 한번 기억되는 이름
가슴에 묻힌 그 이름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흰 구름 한가로이 떠있는 푸른 하늘이
동작동 언덕을 평화롭게 휘호하고 있었다.
무명용사와 미발굴 전사자들의 공간인
충혼탑 뒤 위령관에 대통령의 추념 화환이 놓여있다.
태극기 깃발 아래 전장의 공포와 두려움에 맞서
죽음으로 나라를 지킨 전사들.
세상 그 무엇이 이들의 한을 위로할 수 있을까.
이병 정준식, 삼촌의 함자를 찾으며
빼곡히 적힌 이름들 앞에서 눈시울을 적신다.
두 손 공손히 모아
이 땅 어디든 그곳에서 모두 평안히 잠드시라 축원했다.
이름 세 글자로 남은 형님을 만나고서
마음 헛헛하게 돌아섰을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이
비문의 이름자 위로 겹쳐졌다.
삼삼오오 둘러앉아
마치 소풍 나온 듯 추모일을 기념하는 사람들로
6월 6일의 현충원은 조용하고 평온해 보인다.
수많은 희생 위에 세워진
대한민국의 평화롭고 당당한 오늘의 모습이다.
목숨 걸고 나라를 지켜낸 호국의 영령들께 보답하는 길은
지금처럼 잘사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
보은의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는 것 밖에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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