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3월이면, 조바심을 내며 이른 봄마중을 떠난다. 구례, 곡성, 광양, 하동은 내게 봄의 이미지로 떠오르는 고장이다. 몇 해째 나의 봄은 섬진강 물길에서 시작되고 있다. 흐린 하루다. 그러나 3월은 잿빛 하늘에도 희망이 담겨 있다.
섬진강의 발원지는 전북 진안의 데미샘이다. 임실, 순창, 남원 좁은 산골을 굽이굽이 지나 곡성의 압록에 이르러 보성강을 만나며 큰 강폭을 이룬다. 남도의 아홉 개 군을 아우르는 어머니의 품처럼 넉넉한 강, 유장한 그 물길을 따르노라면 마음은 덩달아 푸근해진다.
임실 오수를 지났다. 눈 뜨면 바뀌는 게 세상이라더니 순천 완주 간 고속도로가 그 사이 새로 생겼다. 달라지는 속도만큼 빠르게 변하지 못하는 게 사람의 정인지라 자고새면 변해가는 이 땅의 모습이 떠나는 친구처럼 섭섭하다.
구례로 접어들자 간간이 매화가 반긴다. 환한 꽃망울을 보며 저절로 입 꼬리가 올라간다. 꽃을 좋아하는 마음은 동심인가 보다. 꽃을 바라보는 그 순간엔 아무런 걱정도 없다.
강 건너 하동의 19번 국도엔 차들이 서행하고 있다. 남도 대교 너머로 화개장터가 보인다. 옥화주막 아주머니는 잘 계시는지. 벚꽃 피는 4월엔 나는 또 저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오란 데는 없어도 갈 곳은 이리도 많으니.
매화가 지천인 강변을 따라 광양 매화마을에 도착했다. 청매실 농원은 칠순을 훌쩍 넘은 홍쌍리여사의 인간승리의 현장이다. 한 여인의 강한 의지가 이렇게 대단한 장관을 일구었구나 싶다. 시아버지가 물려주신 몇 그루의 첫 매화나무를 잘 키워 보존한 정성이 감동적이다. 비탈진 산자락을 갈고 닦아 시아버지가 물려주신 그 매화나무로 온 산을 매화 천지로 만들었다. 봄이면 수많은 상춘객을 이곳으로 오게 만든 홍여사의 놀라운 힘이 존경스럽다.
가파른 매화 숲길을 걸어 언덕에 올라선다. 하얀 모래톱이 반짝이는 강을 내려다본다. 여유로운 흥취에 젖은 건가. 꽃보다 더 많은 인파가 하나도 번잡하지 않다. 길 한 켠 좌판에 혼자 앉아 재첩국에 동동주 한잔을 청하고 맛있게 먹는다. 주인아주머니가 홀로 하는 여행이 보기 좋다며 인심 좋게 공짜 한잔을 더 주신다. 고맙기도 하시다.
천천히 강가로 내려왔다. 스피커로 연신 울리는 각설이의 트롯 메들리에 북적거리는 구경꾼에 사방이 주차장이다. 이 많은 이들이 홍여사의 인덕으로 밥벌이도 하고 꽃놀이도 하고 있으니 이런 북새통쯤이야 감사할 일이다. 광양시의 세수에 이분이 기여한 공이 크다고 하니 왜 아니겠는가.
인간사의 복잡함은 상관없다는 듯 유유하게 섬진강은 흐르고 있다. 재두루미 서너 마리가 물위를 나르고 매화 핀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린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시 한 편이 생각나는 날, 오늘은 흐린 하늘조차도 쓸쓸하지 않은 봄날이다.
나 찾다가
텃밭에
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
예쁜 여자랑 손잡고
섬진강 봄물을 따라
매화꽃 보러 간 줄 알그라
<봄날> 김 용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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