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 있는 풍경이라면 그 곳이 어느 곳이든 사람을 모이게 한다. 세상은 즐기는 사람의 것이라 하지 않던가. 가을의 지리산을 찾아 온 이들로 첫 새벽 2시 10분의 구례구역은 마치 출근길의 전철역마냥 초만원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일상의 피곤에 겨운 허둥거림을 대신해 설렘과 기대로 하나같이 행복해 보인다는 것이다. 자신의 키만큼이나 높고 무거운 배낭을 메고도 힘든 내색은커녕 너도나도 싱글벙글이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은 고생을 사서하더라도 기꺼운 모양이다. 가랑비가 내려 스산한 날씨임에도 누구도 개의치 않은 듯 삼삼오오 목적지를 향해 제 몫의 길을 향한다. 지리산의 비경이 오늘은 그들의 것이리라.
이렇게 수많은 이들이 경치 좋은 산야를 찾아 철마다 길을 나선다. 단지 시간이 허락되어서 아니면 삶이 여유로워서만은 아닐 것이다.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에 동화되길 원해서이다. 자연과 더불어 아름답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에 어떤 번거로움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시간과 때에 따라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면 또 봄은 반드시 오는 순리를 따르고 싶은 바람이 있기에, 거짓 없는 그 질서의 흐름에 같이 하고픈 내재된 소망으로 산을 찾고 들을 찾는다. 계절이 주는 깨달음을 배우는 그 마음이 아름답지 않을리 있겠는가. 그래서 주말이면 도로가 몸살을 앓고 산과 들이 비명을 질러대도 자연을 향한 사랑이 있는 한 모든 번잡함은 용서가 된다. 하늘과 구름을 올려다 볼 줄 알고 계절마다 꽃과 잎의 피고 짐을 바라볼 줄 안다면 세상 험한 일은 반으로 줄지 않을까.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지인과 만났다. 두 달 전에 반야봉 길을 함께하고 다시 뵙는다. 새벽 잠을 설치며 일찍 나와 준 정성이 고맙다. 사람 사이에 정으로 길이 놓이고 나면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도 친절을 베풀게 되고 그저 반갑기만 한가 보다.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 산길로 들어서는 절 입구는 촉촉한 가을비가 내려 한결 더 운치 있는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물기 머금은 붉은 잎들이 더욱 선명한 가을빛을 발하며 살포시 떨어진다. 길 위엔 단풍잎과 갈잎이 지천이다. 만추의 절경을 누리며 행복감이 마음 가득 차오른다. 무욕무아의 경지는 바로 이런 것일까.
새벽을 적시던 가을비는 이제 그쳤다. 봄날의 꽃보다 더 황홀한 피아골의 단풍은 한해살이를 마치는 감사함의 빛을 담아 자신을 밝게 빛내고 있다. 떠날 때를 아는 이들의 숭고한 모습을 닮은 가을 단풍, 파란 하늘이 비치는 계곡의 맑은 물 위로 형형색색의 가을 잎들이 흩날린다. 이처럼 화려한 그림이 있을까.
발걸음을 옮기며 하나 둘 산길의 낙엽을 줍는다.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도 길을 나서지 못하는 동무들을 생각한다. 길을 떠남은 쉼의 의미를 내포한다. 여행은 사치가 아니다. 한 호흡 가다듬으며 마음이 쉬어 가는 시간이 여행 아닌가. 선뜻 나서지 못하는 그들에게 피아골의 낙엽을 건네며 말할 것이다. 있잖아, 삶은 가끔씩 쉬어가야 해. 그래야 먼 길을 오래 갈 수 있거든. 피아골의 단풍은 나에게 긴 호흡 한 가닥을 선사한다. 나는 조금 더 먼 길을 편안히 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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