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답사기

 

사는 동안 한 번쯤은 전환점이 필요한 때가 있다. 삶의 터닝 포인트가 절실해지는 그 때, 어떤 형태로든 실마리를 찾아야겠다는 심정으로 이 땅의 끝까지 가고 싶었다. 땅끝 그 마지막 지점에서 또 다른 시작의 의미를 찾고자 길 떠나는 순간을 갈망하며 기다렸다. 나의 남도 답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새로운 출발을 꿈꾸며 오늘에서야 길을 나선다. 8월의 끄트머리에 아직 태양의 뜨거움은 시들지 않았지만 산하의 푸르름은 조금씩 가을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겐 힘든 숙제는 늘 뒤로 미루고 회피하는 몹쓸 버릇이 있다. 광주가 그랬다. 뼈아픈 역사의 현실들은 풀기 힘든 숙제처럼 애써 외면하고 여고친구인 80학번 C와 84학번 K 두 친구의 모교인 조선대의 이미지만을 지니고 있었다. 삶의 터닝 포인트를 찾고 있는 내가 광주를 첫 번째 방문지로 정한 이유는 그런 의도적인 무관심을 불식시키고 정면에서 아픈 현실을 직시하고픈 의지가 있어서였다. 어렴풋하던 예감은 호남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적중했다. 왜 광주의 민심이 그렇게 일순간에 폭발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길에서 알 수 있었으니까. 서울 외곽의 변변한 국도보다도 더 열악한 호남 고속도로의 조악한 상황은 많은 걸 느끼게 했다. 짧은 시간 안에 얼마나 제대로 느끼고 깨달으랴만 오도된 시대의 아픔이 길을 통하여 비장하게 밀려오며 미루어 둔 숙제 하나와 맞닥뜨리기 시작했다.

광주로 들어서며 제일 먼저 망월동 5.18 묘역을 찾았다. 이름자 적힌 비석 옆에 나란히 세워진 앳된 얼굴의 영정들. 내 아들, 내 딸처럼 어여쁜 어린 넋들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마구 후벼대어 그들 앞에서 차마 편안히 숨쉬기가 힘겨웠다.

 

8월 뜨거운 뙤약볕 아래

어린 그대 누웠구나

시절이 험하고 망측하여

그대 눈 감은 이 자리

하늘은 높고 파랗게 열려

부끄럼 없고

흰 구름 무심하게

님들의 거처 지나간다

 

망자의 진혼인양

색색의 천 바람에 나부끼고

그 날 처절한 함성인듯

매미소리 묘역에 울린다

피어나지 못한 육신

대지에 누웠어도

그대 피 빛 절규는

저 하늘에 살아 있으리

 

어느 땐가 그대 넋 달래며

생채기 어루만질 날 있으리니

목 놓아 붉은 울분

떨쳐 낼 그 날

하얀 얼굴로

해맑게 웃을 그 날 그리며

어여쁜 넋이여

부디 편안히 잠드시라

 

무거운 마음 한자락 남기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시내로 돌린다. 처음 보는 광주는 인구 160만의 광역시로 생각과는 달리 크지 않았다. 구 도청을 중심으로 금남로 주변의 구 시가지와 신시가지인 상무 지구, 첨단 지구, 주거지인 풍암 지구, 금호 지구로 크게 구분되고 있다. 현재 구 전남도청은 철거 안이 진행되어 존폐의 위기에 처해 있는 형편이다. 80년 5월을 잊은 걸까.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언젠가는 저 역사의 현장이 우리에게 값진 보물이 될 수 있음을 한 번쯤 짚고 넘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고속철이 지나는 송정리역 근처에는 이색적인 풍경이 있었다. 역을 오른쪽에 놓고 잠시 올라가다 보면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과거와 현대가 확연히 대비되어 마치 개발의 흐름이 한 지점에서 갑작스레 뚝 멈춘 듯한 경이로운 장면을 만나게 된다. 번듯하게 서 있는 송정역 역사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허름한 마을이 길 하나 사이로 바로 이웃해 있었다. 발전과 진보만이 능사는 아니지만 이렇듯 차별된 상황을 마주하면 새삼 개발의 형평성에 대한 아이러니를 느낀다.

기억 속의 장소 처럼 왠지 낯설지 않은 그 마을을 지나 나주로 가는 길목에 토속적인 이름의 황룡강이 있다. 강을 길게 가로지르는 이름만큼이나 고풍스런 황룡교 낡은 다리는 시간의 흐름을 잠시 잊게 만든다. 향토 음식인 떡갈비로 유명한 송정리의 먹거리 골목에서 점심을 먹고 영산강 위로 길게 놓인 극락교를 지나서 아픔의 역사와 광주를 뒤로 하고 다음 목적지 해남으로 향한다.

 

13번 국도를 통해 해남으로 가는 내내 길옆으로 정겨운 이름의 고장들을 스친다. 조금은 무거웠던 마음에 여행의 즐거움이 천천히 다가왔다. 남도 땅은 그 기운이 온화하고 부드럽다. 드넓은 들녁을 따라 해남에 가면 땅끝마을이 있다. 언제부턴가 그곳이 막연하게 그리웠다. 매사에 의미를 부여하길 좋아해서일까. 끝까지 가면 뭔가 새로움이 있을 것 같은 기대감으로 땅끝이라는 어감에 많은 것을 담아 상상하곤 했다. 다가갈수록 자꾸 마음이 설렌다.

해남이라는 이정표를 지나고도 한 시간 여를 달린 것 같다. 드디어 땅끝이다. 일몰이 시작되는 때에 맞춰 도착했다. 감개무량의 벅찬 느낌이 발걸음을 가볍게 만든다. 땅끝마을의 언덕엔 멋진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까진 모노레일이 있고 조금 아래 바닷가엔 땅끝탑이 있다. 9층 전망대에 오르자 다도해 바다의 고즈넉한 풍경과 작은 마을의 정갈함이 시야로 들어온다. 왼 편 창가로 예쁜 등대가 보이고 크고 작은 섬들의 중앙으로 보길도가 보인다. 반도 끝의 바다는 섬들 사이로 서서히 저물어 가는 일몰의 평화로움에 물들고 있었다.

여느 바다와 같지만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곳, 땅끝. 남쪽 끝의 조그마한 마을이 이처럼 명소가 된 까닭은 여기 이곳을 매개로 새로운 시작의 의미를 찾고 싶은 많은 이들의 욕구가 있어서가 아닐까. 세상 어디서건 의미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찾는 것이리라. 내게도 이미 땅끝은 시작의 의미로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씩 어둑어둑해진다. 그래도 머물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라 내친 김에 완도로 길을 재촉한다. 42km남짓의 거리면 무리는 아니겠다. 77번 국도는 동해의 7번 국도처럼 해안을 끼고 달리는 바닷길이다. 밤이라 아쉽게 경치를 조망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떠랴. 늦여름 훈풍에 실려오는 짭조름한 바닷내음과 잔잔하게 들리는 파도소리가 있다.

완도 대교는 대교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지나고도 모를 만큼 좁고 작은 다리였다. 한참을 지나고도 깜깜한 도로만 보일 뿐 차도 없고 인가도 없다. 초행의 완도라 조금은 불안하다. 선착장으로 길을 잡았는데 얼른 나타나질 않는다. 잠시 후 멀리 불빛이 군집한 시가가 보인다. 그렇지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지 하며 안도의 숨을 내쉰다.

완도 여객 터미널 앞에서 명사십리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이왕 섬에 왔으니 피서지에 한 번은 들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러나 착각도 잠시고 도시 사람이 하는 실수가 바로 이거구나 하는 걸 절감한다. 휴양지는 우릴 위해 늘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이미 8월 하순이라 해수욕장은 파장한 후였다. 피서객들이 모두 떠난 해변의 휑한 풍경이라니. 철석거리는 밤바다의 파도가 허한 심사를 잠시 위로해 준다.

다시 시내로 접어드는데 길가에 불이 밝혀진 민박과 식당이 보인다. 반가움에 흥정을 마치고 늦은 저녁을 청한다. 섬사람들의 넉살이 좋아서인지 금새 사장님, 주방 실장님이 동석한다. 낯선 곳에서 낯선 이들과 별 뜻 없는 이야기로 웃고 떠들고 목청 돋우는 것 또한 여행의 별미겠다. 이렇게 하루는 명사십리의 밤과 더불어 추억 한 조각을 남기고 저문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이면 금방 추억이 되는 것.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것들이 정리되고 있었다.

 

이른 시각인데 바깥이 소란스럽다. 햇살 가득한 창문을 열자 신선한 새벽 공기와 함께 완도의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들판 너머로 선착장이 보이고 코끝에 닿는 바다내음이 섬의 정취를 느끼게 해 준다. 여행지에서의 잠은 깊이 들지 못하는 법이라 딱히 급할 건 없어도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한다. 어제 동석했던 분들과 손을 흔들어 작별하고 해남과 목포의 중간쯤에 있는 독천이란 곳으로 향한다. 내겐 생소한 지명이지만 서울 등의 외지인들에게 갈낙탕으로 이미 많이 알려진 곳이란다. 아침 겸 점심을 예서 먹기로 정하고 여행의 별책부록 맛 따라 길 따라 독천으로 떠난다. 남도 지방의 국도는 참으로 아기자기하다. 길 양편으로 이름 모를 붉은 빛과 보라의 꽃나무들이 소박하고 정겹다. 이른 오전인데도 햇살이 따갑고 눈부시다. 창을 활짝 열어 시원스럽게 바람을 맞으며 여행의 재미를 누린다.

산과 개천을 배경으로 아담하게 자리한 독천은 작은 마을임에도 품격과 여유가 보이는 아름다운 고장이다. 마을에는 낙지 거리가 따로 있고 멀리서 오는 타지 사람들을 배려하여 개천 변으로 큰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다. 입구에 사진이 크게 붙은 독천 식당에서 유명하다는 갈낙탕을 주문하였다. 정갈하게 담긴 밑반찬이 먼저 나오고 잠시 후 주 메뉴가 나온다. 세발낙지와 갈비탕이 어우러져 담백하게 감칠맛을 내는 주 메뉴도 일품이지만 십 여 가지의 밑반찬들이 단연 압권이다. 음식도 문화다. 남도 사람들은 기다림을 맛으로 엮어 내는 묘한 재주가 있나 보다. 여러 종류의 젓갈과 절임 반찬, 김치 등에는 모두 시간이 베푸는 세월의 맛과 정성이 담겨 있다. 남도의 정을 가득 음미하며 식사를 마치고 오늘의 최종 목적지 백양사로 떠난다.

온 산하에 가을이 찾아오면 어김없이 들먹이는 내장산 단풍. 백양사는 단풍의 명소로 유명한 내장산 자락에 있다. 가을이 올 때마다 꼭 한 번 가야지 하고 벼르다가 결국 계절이 오기 전에 먼저 찾는다. 전남 장성에 인접한 백양사에는 호남선 열차가 정차하는 기차역이 있다. 예전엔 간이역이던 이곳은 근처에 백양사로 가는 군내 버스도 있어 호젓이 찾기에 좋은 곳이다.

내장산의 울창한 삼림을 뒤로 두고 백제 무왕 때 창건된 백양사는 입구의 계곡과 더불어 주변 경관이 절경이다. 이 무렵의 계곡은 진초록의 물빛이 더욱 푸르러 가을 단풍의 화려함과는 다르게 깊은 정취가 있다. 절 입구까지 길게 뻗은 단풍나무 터널은 짙은 녹음으로 울창하게 그늘을 이루고 있다. 서서히 단풍이 물드는 가을이면 정말이지 장관이 펼쳐지리라. 절은 지금 한창 보수 공사 중이라 아쉽게도 고즈넉한 산사의 느낌을 맛볼 수는 없었다. 백학봉의 웅장함을 뒤로 한 대웅전 배경의 사진 한장으로 서운함을 접는다. 사는 게 그런 거 아닐까. 조금 부족한 듯 여운을 남기며 내일을 또 기약하는 것. 올 가을엔 백양사의 진면목을 꼭 느껴 보리라며 다음을 약속한다.

남도의 끝을 돌아 다시 처음으로 가는 긴 여정을 백양사에서 마무리 한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진입하기 위해 백양사 I.C. 방향으로 지나가다 탁트인 장성호를 만난다. 시골답지 않게 깔끔하고 정갈한, 호수 옆 어디께의 식당에 들렀다. 장성호가 시원스레 한 눈에 들어와 조망이 일품이다. 호수 옆으로 소담스럽게 심은 화초들이 너무 예쁘다. 국도 변의 이름 모를 꽃나무중 하나가 백일홍이라는 것을 여기서 알았다.

주문한 매운탕과 복분자가 나오자 두고 온 얼굴들이 어른거린다. 그들과 만나 서로 부대끼며 일상을 열어가야 한다는 자각이 들며 이제 여행도 끝나는구나 싶다. 많은 걸 담고도 여행의 마무리는 늘 허전함으로 돌아온다. 아마도 그 헛헛하게 빈 느낌이 또 다른 여행을 준비하게 만드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진정한 여행은 나를 떠나기보다 나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닐까. 참된 여행은 길을 얼마나 많이 아는가가 아니라 길을 얼마나 읽을 줄 아는가에 있다는데 나는 내가 걸었던 길 위에서 얼마나 바르게 길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지.

언제나 다른 무언가를 꿈꾸어 왔지만 시작할 용기가 부족했을 뿐이다. 그 어떤 실마리든 풀 수 있는 힘은 항상 내 안에 내재되어 있었다. 한 걸음 앞을 향해 나갈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다독이고 격려했던 남도 여행길이다. 이제 그 길에서 찾은 의미와 함께 나는 또 새로운 길을 용감하게 걷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