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한국의 길

아 지리산

정진숙 2012. 9. 10. 21:13

 

 

 오래전 알고 지내던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대뜸 하는 소리가 지리산 갈래요? 빨치산 대성골도 가고, 왜 있잖아요. 영화 남부군에 나오는 이현상, 그 사람 죽은 빗점골도 갈 거예요. 카톡으로 보내온 뜬금없는 글에 부끄럽지만 그 사람이 누구지, 이게 무슨 소릴까 했다.

 지리산이라면 계절마다 몇 차례 찾곤 하던 명산이지만 나에게는 범접하기 힘든 큰 산으로, 그저 장엄한 자연으로만 인식되어 있을 뿐 그 나머지의 역사엔 관심을 두지 않았던 터다. 아니 어쩌면 과거사의 고통을 내 걸로 만들고 싶은 생각이 아예 없었다는 게 더 맞는 말이겠다. 눈앞의 급급한 삶에 치이느라 이념의 언저리를 맴돌 만큼의 호사를 누리지 못한 까닭에 더욱 그랬다.

 그러나 내가 외면하던 과거사의 치열함 속에 아직도 묶여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남아 있었다. 이번 지리산 기행은 그런 사람들의 궤적을 따라 그들의 삶을 돌아보는 일정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지리산에 묻힌 지나간 날의 명암을 같이 끌어안아 보자는 의미를 담았다기에 흔쾌히 팀에 합류했다. 제일 먼저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 1,2>권을 읽는 것이 숙제였다. 어딘가를 가기 위해 책을 사고 읽고 한다는 게 신선해서 좋았다.

 이 소설의 작가 정지아는 빨치산 아버지와 남부군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그녀의 부모가 은신했던 지리산의 지와 백아산의 아를 한자씩 따서 지은 운명의 굴레 같은 이름 지아, 그녀는 그 이름에 얽힌 역사만큼 힘겨운 삶을 부모에게 물려받아 살아왔던 것 같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라면 굳이 피비린내 나는 과거사를 들추고 싶진 않을 것이다. 피할 수 있다면 비켜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로 사라질리 만무하고 어제의 연장이 오늘이듯 지나간 아픈 시간은 어떻게든 현재 속에서 상처로 남기 마련이다. 더구나 그 소용돌이의 중심을 온 몸으로 뚫고 나와 살아남은 사람은 처절한 그 기억들이 얼마나 버거웠겠는가. 소설을 읽는 내내 애써 도리질하며 모른 척한 사실과 대면하는 마음은 무겁고 답답하기만 했다.

 

 하동군 화개면 의신에서 일정이 시작되었다. 가파른 길을 삼십 여분 올라 원통암에 도착했다. 서산대사가 이 절에서 출가를 결심했다는 작은 암자였다. 선한 인상의 스님이 어디서 오셨나며 말을 건네신다. 그리고는 창에 걸린 풍경사진 한 장을 쓱쓱 닦으며 보여주신다. 맞은 편 광양 백운산의 탁 트인 조망이 한눈에 들어오는 사진이었다. 흐린 날 찾는 이에게 보이기 위해 볕 좋은 봄날에 찍어두셨다니 그 선한 마음이 내게로 전해진다.

연산홍 담장 너머로 보이는 넓게 펼쳐진 백운산 위로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골짜기 사이 움푹 들어간 곳이 내일 찾게 될 한재라고 인솔자가 설명한다. 그곳에서 정지아의 아버지 정운창옹의 수목장을 지냈다고.

 서산선문이라 쓰여 진 절 집 대문을 나와 대성골로 향한다. 등산로가 아닌 골짜기는 험하고 가파르다. 무엇이 그들을 이런 사지로 내몰았을까. 거친 산길을 숨어 다니며 목숨을 내놓은 채 숨 가쁘게 살았을 고립무원의 절박함에 이념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산화한 젊음들에 대한 안타까움만이 밀려왔다.

 비등로를 벗어나며 덕평남릉 능선에 올라선다. 왼쪽 위로는 선비샘, 오른쪽 아래로는 대성골로 접어드는 산길이다. 이 골짜기는 빨치산의 마지막 격전지였다. 1952117일 함박눈이 내려 지리산을 가득 메우던 날이었다. 사방의 능선위에 토벌군이 진을 치고 퇴로를 막았다. 계곡 아래서는 물밀 듯이 토벌대가 밀고 들어왔다. 대성골로 토끼몰이 되어 내몰린 그들은 땅과 하늘에서 사정없이 쏟아 붓는 포화 속에서 대부분 전멸하고 말았다. 천여 명이 사망하고 극소수의 생존자가 남았다. 정지아의 어머니 이옥자여사는 그 중 한사람이었다.

 지금 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대성골은 너무도 평화롭게 녹음에 잠겨있다. 마치 지나간 피의 시간은 꿈이었다는 듯. 그들은 이제 모두 편안히 눈을 감았을까. 아니면 이 골짜기 어디 께를 아직 맴돌고 있을까. 대성골 계곡의 물소리가 세차게 귓전을 울린다.

 

 의신으로 원점회기 한 우리는 벽소령 길목의 운해산장에서 막걸리를 한 병 준비해 빗점골로 출발했다. 입구 삼정농장에 여장을 내려놓고 해거름 무렵에야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최후를 맞은 빗점골 계곡으로 걸어갈 수 있었다. 조금씩 어두워지는 임도 주위로 지리산의 울창한 기운이 우리를 압도한다. 이 깊은 골짜기에 숨어 훗날을 도모하는 그의 심정은 어땠을지. 끝이 빤한 싸움을 버텨내는 그 참담함에 가슴이 조여 온다.

 우렁찬 물소리가 끝까지 따라오고 있었다. 크고 작은 바위가 널브러진 빗점골 계곡은 절터골, 산태골, 왼골, 세 개의 골짜기가 하나로 모여드는 범상치 않은 지형이다. 뒤로는 험한 산이 가로막아 서고 앞으로는 계곡 물이 넘쳐 수량이 풍부하다. 게다가 마을이 가까워 먹을 것을 구하기도 수월했으니 그가 은신하기에 적절한 천혜의 요새였다. 예부터 기가 센 터였다는 이곳은 비 오는 궂은 날이면 인근 사람들도 가까이 하기 꺼리는 장소가 되었다 한다.

 그의 죽음에 관한 설은 여러 가지 있지만 초라하게 세워진 표지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지역은 남부군 빨치산의 총수였던 이현상이 1953918일 오전 11시경 서남지구 전투경찰사령부 제2연대 차일혁 연대장 예하 수색대장 김용식이 이끄는 33명의 수색대와 교전을 벌이다 숨진 곳이다.’ 라고.

 현대사의 씁쓸한 현장 앞에서 잠시 말문이 막혀 먹먹해진다. 그들의 투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내 짧은 식견으론 자세히 모르겠다. 단지 내가 죽고 나면 그만인 그 이념이란 것에 묶여 목숨 걸고 싸우다 허망하게 산화한 빨치산과 토벌군, 그리고 그 틈에서 무고하게 죽어간 지리산 자락의 힘없는 민초들의 생이 가엽다. 그들 역시 이 땅의 백성이기에 그 모든 주검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들 모두가 변해가는 세상의 힘에 눌려 그 틈바구니에서 무참하게 사라져간 피해자 아니었을까.

 짓눌리다 보면 어느 한쪽으로 튕겨나가는 것이 이치일 것이다. 최선은 아니더라도 더 나은 무엇을 향해 자꾸 진보하는 것이 체제 아니던가. 낡은 하나가 저물면 새로운 하나가 떠오르는 것처럼 그들도 역사의 수레바퀴가 남긴 한 흔적임을 어쩌겠는가. 더는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만을 간절하게 빌고 빈다.

준비한 막걸리를 주위에 뿌리고 지리산에서 죽어간 이들의 넋을 위로 한다. 어둑어둑한 이 계곡을 여태껏 못 떠나고 맴돌고 있으려나. 나의 등줄기로 서늘한 슬픔이 그네들의 혼처럼 스친다. 마음 무거운 저녁이다.

 

 간밤의 번잡함은 어디로 간 건지. 아마 감정이 한껏 복받쳤던 모양이다. 마당에 차린 저녁을 겸한 술자리에서 과하게 흥분했던 것 같다. 그리곤 제 풀에 먼저 쓰러져 일찍 잠들었다. 지리산 가객 정용주님의 노래가 아직 밤하늘에 울리는 듯 가물거린다. 정지아님에게 무언가를 물었던 기억도 어른대고 조성봉감독에게 만나서 반갑다 말했던 것도 같고.

 민망함에 머뭇대며 눈을 뜬다. 마루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늦게까지 남아 피곤할 텐데 벌써들 일어났나 보다. 방문을 열고 나서자 산자락이 코앞으로 다가선다. 비가 내려 지붕에서 낙숫물이 떨어지고 있다. 누렁이 한 마리가 산에서 내려온 고슴도치를 이리저리 굴리며 논다. 지리산의 새벽이 조용히 열리고 있었다.

 우리가 묵은 농장은 흑염소를 키우는 집이다. 아침식사로 진한 흑염소 곰국을 내온다. 생소한 음식인데 구수한 것이 맛나다. 식사를 마치고도 비는 그칠 기세가 아니다. 일부 산행구간은 접고 한재로 바로가기로 한다. 화개로 나와 남도대교를 건넜다. 광양에서 바라보는 화개골은 구름이 걷히고 있었다. 섬진강 위에 서서히 흐르고 있는 구름의 장관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백운산 한재 근처는 전남도당의 본거지였다. 따리봉 아래 한재까지 중한치에서 삼사십 분정도 걸린 것 같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어도 나쁘진 않았다. 그 나름의 운치가 조금은 차분해진 심경과 맞물려 적절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운해가 피어오르는 백운산 길을 달리며 어떤 인연의 끈이 우리를 이곳으로 오게 했는지 생각해 본다.

 편안히 닦인 길을 따라 시나브로 걷는 사이 수목장을 지낸 나무 근처에 도착했다. 인솔한 조감독이 잘 생긴 잣나무 한 그루를 가리킨다. 나뭇가지를 훌쳐 내자 검은색 돌비석이 드러난다. ‘그리운 이들의 품에 안기다정지아가 아버지를 위해 자필로 쓴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운 이들, 그렇다. 그들은 서로 그리워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의 시간이 아니라 뜨거운 희열의 순간으로 그 기억들을 가슴에 담고 살았다. 들리지 않는 소리로 끊임없이 혁명을 외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기심 가득 찬 보통의 인간이라면 감히 꿈꿀 수 없는, 나를 버린 채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 했던 그 끓는 열정의 순수함만은 왠지 외면해선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이 꿈꾸던 유토피아가 현실 속에 존재하기나 한 건지. '꿈꾸는 일은 쉽고도 아름답다. 그러나 꿈처럼 산다는 것은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꿈처럼 살다간 이들, 한재를 내려오며 참 많은 생각이 오고 갔다. 정운창의 수목장 근처에는 몇 개의 수목장이 더 있었다. 그를 혁명가로 기억해 주길 바라는 아우의 바람이 담긴 나무도 있었고 어미의 과거를 냉정하게 외면하는 아들을 둔 손영심 할머니의 나무도 있었다.

 이 일들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 보듬어 안으려 애쓰는 이들이 있어 다행이라 여기고 말아야 하나. 어제와 오늘이 만나 서로 화해하는 일이 지금은 불가능 할까. 짧은 일정에 편협한 내 지식으로 접근할 성질의 주제는 아니었다. 결코 쉽지 않은 문제 아닌가. 문척 반내골로 향하는 발걸음이 그리 가볍지마는 않았다.

 

 구례군 문척면에 있는 반내골의 한 식당은 옛 빨치산들이 산에서 먹던 음식을 주 메뉴로 만들어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산닭 숯불구이. 연기가 나지 않는 생강나무를 태워 구워먹던 것을 숯불로 바꿔 굽는 게 달라졌을 뿐, 그들이 근처 산이나 민가에서 잡은 닭을 구워먹던 그대로 재연했다. 생사의 기로에서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먹었던 그 음식을 이제는 입이 즐겁기 위해 먹고 있다니 참 희한하고 재밌는 일이다.

 그러고 보면 절대적인 그 무엇이란 없는 것 같다. 내 것만 옳고 다른 것은 틀리다고 해서도 안 될 것 같다. 세상은 큰 흐름을 따라 순리대로 바뀔 따름이다. 만약 그들의 투쟁이 세상의 큰 흐름이었다면 과연 역사는 바뀌었을까. 답하기 힘든 거창한 물음에 대한 단편적인 나의 느낌은 접어두자. 다만 이틀간의 기행에서 얻은 절실한 마음 하나는 더 이상 이 땅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아픔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긴 시간동안 내가 사랑하여 찾았던 지리산, 그 산은 그저 자연의 장엄함만을 지닌 산이 아니었다. 우리의 지나간 과거사를 생생하게 품고 있는 모성의 산. 아마도 그곳에 서린 슬픈 상처로 인해 그 산을 밟을 때마다 나는 가슴이 저려 옴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 말이 없구나

  스치는 바람소리뿐

  험난한 세월에도

  쓰러지지 않았구나

  반야봉의 새소리

  백무동의 물소리

  지친 영혼 어루만져 주는

  그대이름 지리산

  아아 지리산

 

 <박문옥곡, 정용주의 노래 지리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