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한국의 길

[스크랩] 9/8-9(토~일) 지리산에서 빨치산의 흔적을 찾아...

정진숙 2012. 9. 13. 22:26

 

 

이번 후기는 지리산 빨치산의 흔적을 찾아나선

여행이었기에 시간을 두고 공부도 해 가면서 차분히 쓰고 싶었다.

 

역사의 아픈 상처를 들춰내는 글이니 만큼

즉흥적으로 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정을 따라 담아 온 사진을 보면서

담담히 써 내려 가오니 즐감하시길 바랍니다.

 

여행은 구례 의신마을에서 시작됩니다.

이곳이 빗점골로 들어가는 마을의 초입입니다.

 

운해산장의 주인장이 직접 빗은 막걸리 맛이 일품이라 하여 서너병을 구매했습니다만,

전통방식의 전(찌짐)은 주인장께서 경조사에 참석한다 하여 아쉽게도 맛을 보지 못했습니다.

 

의신마을 전경을 담아 보았습니다.

의신마을에서 빗점골로 들어가는 초입부입니다.

 

청와대를 기습할려다 체포된 김신조가 북한의 남침 시나리오를 불게 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북한의 특수부대가 아군의 레이다에 걸리지 않는 AN-2기를 타고

지리산에 투하하여 후방에 제 2의 전선을 구축한다는 겁니다.

이에 기겁을 한 박정희의 지시에 의해

긴급으로 정상까지 연결되는 군사도로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낙하산으로 투하하는 즉시,

군병력을  바로 투입시켜 일망타진하겠다는 거지요.

마을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

많은 인부들이 폭파와 낙석사고로 죽었다더군요.

 

 

상사화,일명 꽃무릇.

 

꽃이 먼저 피고 잎이 나중에 피는 관계로 평생 마주할 수 없어

서로 그리움만 삭이는 꽃이라 상사화인가요.

 

이 꽃은 본래 군집을 이루고 있는지라,

돌계단에 화사하게 홀로 피어 시선을 끄는게 사뭇 호기롭습니다.

 

상사화는 옛부터 사찰에서 단청을 할 때,

붉은 물감의 재료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상사화의 최대군락지가 고창의 선운사와 영광의 불광사,

사찰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겠지요.

 

 

서산선문이라 적혔네요.

원통암은 서산대사가 머리를 깍고 출가한 암자라고 합니다.

 

속가에서는 원통이란 말이 꽤나 억울하고 분하다는 의미이지만

불가에서 원통이란 의미는 모든 것이 두루 통한다.즉,막힘이 없다는 말이겠죠.

스님의 미소가 해탈의 미소가 아닐까 싶어 몰래 담아보았습니다.

 

 

암자가 고즈넉한게 더 없이 평화롭습니다.

앞으로는 전망이 터져 백운산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내일 넘어가야 할 백운산의 한재가 보이는군요.

그 뒤의 완만한 능선이 왕시루봉 같은데 대장님 맞나요?

 

남무관세음보살(나무관세음보살)

범어(인도어)의 음독을 한자로  표현하니 남무가 되었네요.

'부처님에게 귀의한다' 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관세음보살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어 주시는 보살이라고 합니다.

 

절에 어떤 부처를 모셨느냐는 법당의 이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미타부처를 모셨으면 대웅전.

관세음보살을 모셨으면 원통보전,원통전,

비로자나불을 모셨으면 적광보전,

뭐, 이런 식 입니다.

 

경내에서 차마...

 불경스러운 음식을 먹을 수 없어....

널직한 집터와 우물터의 흔적이 남아 있고

 

절구통이 있는거로 보아 제법 규모가 있는 집이었는가 봅니다.

혹시 지주계급이라고 끌려 나가 죽창에 죽임을 당했을까 상상을 합니다.

모두가 동족상잔의 상흔이 아니겠는가.

 

삼정마을에서 여장을 풀고 어둡기 전에

이현상 선생이  최후를 맞았던 빗점골을 찾아 갔습니다.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의 죽음은 아직도 미스터리입니다.

위 사진의 너덜지대에서 시신을 수습한건 분명하지만,

 누가 쏜 총에 맞았는지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미 북의 지령에 의해 사령관 직도 박탈 당하고

무장해제 된 채, 자신의 애를 임신한 비서를 만나러 하산하다가

매복중이던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북의 지령을 받은 자로 부터 암살을 당했다는 주장도 제기 되나 봅니다.

 

묘비도 아니고 최후를 맞은 안내문 치고는 너무 초라합니다.

 

현대사의 가장 처절했던 동족상잔...

그 역사의 소용돌이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었지만

아직도 그는 빨갱이라는 수의를 입고 있을 뿐입니다.

 

저녁에 모두 모였을 때, 소회를 한마디 뱉었는데

아직도 동족을 품지 못하는 이데올로기의 잔재가

너무 뿌리 깊어 슬프다고 했습니다.

 

마치 우리가 초딩 때,

교정의 중심에 세워진 이승복 동상을 보는 느낌이랄까.

아직도 시골학교에 가보면 그 동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있습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했다가 입이 찢겨져 죽었다지요.

오래전 당시 취재기자가 쓴 회고록에 의하면 모두가 짜여진 각본이었다는 겁니다.

반공이데올로기가 만들어 낸 헤프닝이라 하기엔 이것 역시 슬픈 우리네 역사입니다.

 

저도 공산당이 싫지만  아직도 동상을 철거하지 못하는 교육자들이 더 싫습니다.

 

안내표지판의 유치한 그림을 보면서 한없이 슬퍼집니다.

 

자주꿩의다리가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을까요.

 

언제나 그러하듯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역사의 기록은 승자의 몫이니  60년이 지나

왜곡된 진실을 밝혀낸다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요.

 

그렇지만 누군가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총상을 입고 저 바위를 기면서 고통스럽게 죽어갔겠죠.

 

누구의 총에 맞았는 지도 모른채..... 

자신의 애기를 잉태한 젊은 여인을 애타게 찾았을까요.

 

허공을 휘젓던 그의 희미한 손떨림마져 멈추었습니다.

 

6개의 크고 작은 계곡이 합수되어 빗점골은 한층 몸집을 키웁니다.

 

4.3 항쟁을 다룬 최초의 다큐멘터리 영화,

레드 헌트(빨갱이 사냥)를 연출한 조성봉 감독입니다.

 

이런 분들의 집념이 없었다면 우리네 역사는 영영 오욕으로 점철되었을 겁니다.

2차대전 후,급속도로 확산되는 공산화 광풍에 미국은 위기를 느꼈을 겁니다.

 

청산되어야 할 일제의 잔재세력들이 미군정의 비호아래 오히려 날개를 달고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 이승만 정권의 주구가 되었습니다.

 

그들과 더불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행하던 서북청년단의 횡포는 극에 달했다지요.

 

4.3 항쟁은 이들의 무차별 폭력에 대한 항거이자,

구조적 폭력에 대한 자위적인 투쟁임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을 겝니다.

 

그가 다음으로 준비하고 있는 작품이 '진달래 산천'이라지요.

2003년부터 준비했다고 하니 범부의 집념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 입니다.

 

맞아죽고 굶어죽고 얼어죽었던 빨치산들의 얘기를 풀어내는게,

마치 그의 숙명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이 자리에서 빨치산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얘기하지 않을렵니다.

 

사실 크게 관심도 없었고 실상 모르기 때문입니다.

 

평촌님이 여기 오기 전에 몇 권의 책을 추천하면서

반드시 읽어보고 오라고 당부했습니다.

 

설사 책을 사주고 읽나 안읽나 감독을 했다 하더라도

책만 펴면 바로 잠드는 나를 어찌 하지는 못했겠지요.

 

 

<이 땅의 평화를 기원하며>

 

이른 아침에 들판에 나가

일하는 농부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지?

 

지리산 싸움에서 죽은

군경이나 빨치산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의를 위해 죽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죽었다고 할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겠는가?

 

그들은 왜 죽었는지

영문도 모른다고 할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이 싸움은 어쩔 수 없이 하지만

후에 세월이 가면

다 밝혀질 것이다.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벌어진

부질없는 골육상쟁,

동족상잔이었다고. . . . . .

 

-서남지구 전투경찰대 제2연대장 총경 차일혁-

 

지리산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전선에서 군대를 뺄 수는 없으니

급조한 경찰 ㅇㅇ연대(학도병같은 지원자 200명으로로 구성된 허접한 부대)의

서남지구 토벌대장 차일혁이 쓴 시입니다.

 

그는 진중일기 라는 일기를 남겨 그때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역시 사회주의도 잘 알고 당시 국제정세를 꿰뚫어 보는 인텔리였지만

서로 죽여야 하는 동족상잔의 비극은 견디기 힘들었는가 봅니다.

 

창경원에서 일반인들에게 전시된 이현상의 시신을 수습하여

섬진강 기슭에서 화장하고

유골은 자기 철모에 넣어 곱게 빻아 주변에 뿌렸다고 합니다.

 

가족도, 일가친척도 모두 외면한 적장의 시신을,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아니하고 거두는 진정한 무인의 모습이

그나마 시린 가슴을 어루만져 줍미다.

 

그리고 아무리 내가 미워도 그렇지....

앞으로 이런 사진은 가려서 올리지 마세요.

 

꼭 정이한테 흑심을 품은 불한당같은 이런 표정을 버젓이 올리는 분은

배려심이라고는 모기 눈꼽만큼도 없는 사람 아닙니까 ㅋㅋ.

 

저녁에 염소를 한마리 잡아 초청손님까지 모두 모였습니다.

 

지리산의 아름다움과 서정을 노래하는 가객 정 용주님과 그의 부인,

 

'빨치산의 딸'을 집필한 정 지아 작가님.

 

다큐 진달래 산천을 준비중인 조 성복 감독님.

 

의신마을에서도 한 시간 이상을 올라가야 하는 삼정마을 민박집에서 1박을 합니다.

이 마을은 5섯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연화천대피소와 벽소령으로 올라가는 삼거리의 분깃점에 위치한  셈 입니다.

 

평상에 누우면 밤하늘의 별천지를 볼 수 있고

계곡의 물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리는 첩첩 산중마을이며

민박이 가능하니 한번 다녀오시길 강추합니다.

 

가객 정용주님,

 

가수가 직접 노래하고 기타치며 반주를 넣어주니 음치인 저도 두어곡 묻어갑니다.

 

좌로부터

전남도당 선전부장 정아님,

전북도당 사회부장 정이님.

남부군 간호부장 신데렐라님.

 

인민무력부에서 밀사로 온 아까님,설광님,평촌님.

 

시대의 아픔을 노래로 토하고

먹은 비리한 것은 입으로 토하고

그렇게...

지리산 빗점골의 밤은 깊어 갑니다.

 

주인 내외가 기거하는 본채이고

우리가 묵었던 사랑채 입니다.

빨치산 최후의 격전지, 대성골입니다.

 

1951년 11월,

게릴라전으로 진행되던 전선은 대대적인 토벌을 위해

백선엽을 사령관으로 하는 야전투사령부가 발족되면서 긴박하게 돌아갑니다.

백장군의 성을 따서 '백야전투사령부'라 일컬어지던 부대입니다.

 

미 8군의 Task force paik 이라는 작전명으로 대대적인 토벌이 감행됩니다.

일명 쥐잡이 작전이며 혹한기 두달 동안 3기에 걸친 작전으로 

빨친산이 거의 괴멸되면서 지리한 전쟁은 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전방에서 수도사단(송요찬 준장)과 8사단(최영희 준장)의 2개 사단이 투입되었으며

미공군의 무스탕 편대가 지원한 엄청난 규모의 토벌작전이었습니다.

 

토벌작전은 녹음이 짚은 계절에는 불가하기 때문에 눈덮인 겨울에 감행되었습니다.

하늘에서 보면 하얀 백지위에 어디 숨을 만한 곳이 있을리 만무합니다.

병력의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능선에서 토끼몰이 식으로 아래로 몰아부쳐 대성골만 퇴로를 열어두어

쫓겨 갈팡지팡하며 살아남은 빨치산의 대부분을 대성골에 가두게 됩니다.

그 다음은 아시겠죠?

 

네이팜탄을 터트려 주변을 불바다로 만드니 모두 바베큐가 되어 타죽었다는 말씀이외다.

지금도 그 지역을 가면 타다만 숯검댕이의 흔적과 숨어지내던  비트를 쉽게 찾울 수 있습니다.

지역 주민들 말씀으로는 3일 동안 숲과 시신이 탔다고 합니다.

 

일간에서는 1만 9천명의 빨치산이 희생되었다고 하고

국방백서에는 5,800명 사살하고,5.700명의 포로를 잡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밤낮으로 점령군이 바뀌는 산중마을의 무고한 양민의 희생까지 감안하면

도더체 몇만명이 죽었는지 모를일입니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섬진강다리입니다.

 

빨치산의 흔적을 찾아가는 인문산행,

지리산의 진달래는 그냥 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들의 피빛 영혼으로 피어난 꽃임을 알았습니다.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저 안개조차 영혼을 달래는 향내음이며

계곡의 물소리 조차 통한의 진혼곡으로 들려 옵니다.

 

뻘겋게 타는 계곡에서 지척의 섬진강이 얼마나 간절했을까요.

恨과 절규를 품은 피빛 강물은 오늘도 굽이굽이 흘러 갑니다.

 

 

빨치산 평전,

남부군,

삘치산의 딸,

.

.

.

어느 한권, 한구절도 읽지 않았지만,

질곡의 현장에서 가슴이 마구 떨려옵니다.

 

저 강만 건넜어도 살 수가 있었을텐데....

사랑하는,그리운 가족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텐데...

그들은 대부분 얼어죽고 맞아죽고 굶어죽었습니다.

 

목수보다 소중했던 그 무엇을 위해서...

 

'빨치산의 딸'을 집필한 정지아님의 부친,

장운창님을 만나뵈러 한재를 오릅니다.

 

철도학교를 졸업하여 철도노동자로 근무하다

48년 입당하여 유격도당 노동부 지도위원으로 활동하시다

 52년에 체포되셨습니다.

 

화장을 하여 유골은 수목장을으로 모셨다고 합니다.

 

어머니 이옥자 여사는 현재 작가와 함께 구례에서 사십니다.

조성봉 감독의 안내로 여사님의 집을 방문하여

희미한 기억이지만 당시의 상황을 실감나게 들었습니다.

 

목숨을 걸었던 시절이지만.

그 분들의 생애를 통털어 가장 아름다웠던 추억은

지리산에서 투쟁하면서 보낸 6년의 세월이었다고 말합니다.

 

선전부장,문화부장님이

어젯밤 염소 한마리로는 양이 안찼나 봅니다.

먹다 남은 염소뼈따구로 꼬실려 데려 갑니다.

 

고달픈 한재로 올라가는 길은 의외로 아름답습니다.

 

 울밑에 선 봉선화도 처량히지만 물먹은 물봉선도 슬픈 표정입니다.

   

그렇게 한많은 세상을 버렸겠지요.

 

따님의 정지아 라는 이름은 부친께서 

지리산의 지 자와 백아산의 아 자를 따서 지어줬다네요.

참으로 고운 이름입니다.

 

정지아 작가님의 아버님도 시적인 감수성이 꽤나 뛰어나셨던가 봅니다.

작가가 고3 때,

부모님이 평소 하는 대화를 들어보면 온통 산얘기 뿐 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사람들의 묘사하고는 사뭇 다른...

'아침에 비트에서 산죽을 털고 나오면 흰 눈발이 햇살에....'

뭐 이런 식으로 말씀을 나누셨답니다.

 

참으로 인상깊어 내내 머릿속에 남아있었던 대목입니다.

 

묘비에 새겨진

'그리운 사람들 품에 안기다'

 

소원대로 되셨으니 여한은 없을듯 합니다.

 

장소를 여기로 모신건 고인이 원해서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냥 화장해서 아무데나 뿌려달라고 했겠죠.

 

한재는 빨치산의 남도도당의 연변장,집회장소,학교,출전기지로 이용되었으며

1218 고지의 백운산 바로 아래 위치한 험지(840) 였던지라

광양과 구례에서 올라오는 토벌군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을 터이니

여러모로 군사적 요충지이며 고인에게도 정들고 의미있는 자리였을겁니다.

 

조성봉 감독이 그런 점을 고려해서 자리를 정해 주었다고 합니다.

    

오늘 중식은 빨치산들이 고안해서 먹었던 닭요리라고 하네요.

 

양념장이 필요치 않아 즉석에서 요리하기 쉽고

숯을 이용하여 연기를 피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보기에는 엉성해 보이지만 의외로 맛이 담백하니 일미입니다.

 

  마지막 자리에서 정지아 작가님께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부모님이 꿈꾸는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습니까?"

 

"그러한 유토피아,즉 사회주의가 지구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굶주리고 고립된 북한의 실상을 보시고 따님께 무슨 말씀을 안하셨습까?" 

 

"결국은 부모님들은 허상을 쫒다가 꽃다운 청춘을 다 보낸 이데올로기의 피해자가 아닙니끼?"

 

 

내딴에는 수준높은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뭐냐? 저 간나 새끼..

모두들 이런 표정입니다.

 

알고보니 작가님의 책에 이 질문에 대한 소견을 밝혀 놓았다더군요.

 

허이구...이런 개망신.

주둥아리 꾹 다물고 있었더라면 본전이라도 하는건데....

 

정리하는 의미에서 작가님이 본인의 책에서 밝힌 소회를 옮겨봅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하고 목숨까지 걸게 했던

사회주의는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중국,베트남,쿠바 정도가 사회주의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사회주의를 현실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 생각하니 '사회주의'란 소련이나 중국으로 대표되는

어떤 제도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 사회주의는

'지금 보다 나은 그 무엇'을 가리키는 추상명사 였습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 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지금보다 더 나은 무엇을 추구하는 동물이므로.

사회주의가 사멸했다고 하는 지금 이 시간에도

더 나은 어떤 세상,인간답게 살 수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었던

옛사람들의 기록은 여전히 유효할 것 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위안에 불과한 것인가요.

 

<복간판을 내며> 중에서.

 

만리장성을 축조한 임금의 이름은 역사에 길이 남았지만

고된 부역에 시달리며 자신들의 피땀으으로 만리장성을 쌓아올린

수많은 민중들은 역사의 저 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최근들어 현대사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이 고조되면서

남부군의 총수 이현상 이니 남도부 니 하는 지도자들에 대한 얘기도 많이 나돈다.

 

그러나 나는 한 탁월한 개인보다는 평등한 세상,통일된 조국을 건설하겟다는

단순한 신념만으로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어 지신의  목숨을 걸고

역사의 일보전진을 위해 투쟁한 수많은 이름없는 민중들의 모습을 알리고 싶었다.

 

내 아버지,어머니도 바로 그런 민중의 한 전형일 뿐이다.

 

정지아 님의 <후기> 중에서.

 

 

 

 

 

출처 : 3050그린산악회
글쓴이 : 가노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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