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절절해진다.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 여러 가지겠지만 바뀌는 계절만큼 우리를 흔들어 놓는 게 있을까. 부는 바람도 예사롭지 않고 보이는 하늘도 가만 내버려두질 않는다. 그럴 때면 떠오르는 곳 중 하나가 섬진강이다.
근데 왜 하필 섬진강일까. 우선 그 곳에 가면 푸근한 고향의 이미지가 있어서 좋다. 그 강에 다가서면 잃어버린 지나간 날이 다시 내게로 다가온다. 버선발로 맞아줄 어머니처럼 다정한 강이기에 무시로 그 강변이 그리워지곤 한다. 섬진강의 그 고운 얼굴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하늘은 높고 바람은 선선한 가을 아침이다. 여행이란 같이 나서도 혼자 가는 것이고 혼자 떠나도 모두와 같이 가는 것. 그렇게 모두와 그리고 혼자 길을 나선다.
섬진강 상류 진뫼마을은 두 번째다. 그 사이 길이 달라졌다. 많은 이들이 다녀가는 이유도 있겠지만 마을 분들의 편리를 위해서 말끔하게 닦아 놓았을 것이다. 흙길로 남아있길 바람은 외지인의 욕심일 뿐 서운함은 그만 접는다.
가을빛을 담은 섬진강은 더욱 깊은 서정을 전하고 있다. 물길 위로 하늘이 담기고 구름이 담기고 산이 담기고, 들판의 풍성함이 담겨있다. 강물 위를 나르는 하얀 백로의 유영이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우리는 가을 풍경 속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시인의 마을답게 곳곳에 시비가 세워져 감성을 두드린다. 김용택 시인이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다니던 천담분교는 지금은 낡은 채로 남았다. 서럽도록 아름다운 이 강변길을 사시사철 매일 걸었다면 누구라도 시인이 되지 않았을까. 둘러보면 어느 하나 시 아닌 것이 없다고 그가 말했던가. 어머니의 잘 가꾼 빨간 고추밭은 그대로 예술품이고 어머니의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시였다고. 시는 대단한 논리가 아니다. 사는 이야기, 자연의 이야기를 내 삶으로 받아들이는 일, 꾀꼬리 우는 짧은 사연에서 역사를 읽어내는 일, 어머니 말씀에서 시를 읽는 일이다 라고.
너무나 아름다워 서러운 그 길을 걷노라면, 귀 기울여 들으면 지렁이 울음소리도 들린다는 시인의 맑은 눈과 밝은 귀를 가질 순 없더라도 그의 마음을 헤아릴 듯도 하다. 그의 말처럼 섬진강을 걷다보면 우리는 모두 시인임을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그가 교사시절을 보낸 천담마을을 지나 구담마을 당산나무 아래서 바라보는 섬진강은 또 어떠한가. 강 건너 순창의 회룡마을을 휘돌아 흐르는 느린 걸음의 강물은 마음 한 자락을 턱하니 내려놓게 만든다. 저리 무던한 강이 또 있을까.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게 만드는 저 무심함, 세상은 말이 없는데 인간만이 소란스러울 뿐이었다.
장구목 매끄러운 바위를 쳐다보며 한참을 걷다보니 내리 쬐는 가을볕이 슬슬 따갑기도 하고 발바닥도 따끔거리며 신호를 보낸다. 좋은 꽃놀이도 잠깐이고 풍경이 주는 호사도 버거워지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졸졸 소리를 내며 따라오는 저 물소리의 유구함은 끝날 줄 모르니 인간사의 간사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마침 일행 중 한 분이 지나가는 트럭을 세웠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몇 시간째 시멘트 길을 걸어 딱 지칠 무렵에 도움을 받게 되니 고맙기 그지없다. 아직 사람 사는 인심이 그리 박하진 않으니 이 아니 기쁜가. 우린 그렇게 장구목에서 벗어나 책여산으로 향할 수 있었다.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눈앞에 나타난 순창의 책여산은 참 만만해 보인다. 그리 높지 않으니 뭐 그리 대수이랴 싶다. 허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 낮아도 산이고 높아도 산이었다. 그 만만하던 산이 이토록 나를 민망하게 할 줄이야. 이래서 사람이 건 산이 건 모든 건 겪어 봐야 아는 법이다.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며 맞닥뜨린 칼바위의 위용은 대단했다. 두꺼비가 일제히 섬진강으로 뛰어들 듯이 솟구친 바위능선은 설악의 장쾌함 못지않았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적어도 고소공포증이 심한 내겐 충분히 그랬다. 산 위에서 내려다 본 순창의 황금 들녘, 너른 들판을 휘휘 돌아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의 강건함, 이 풍경을 보이고 싶어 애태운 인솔자의 애정이 충분히 전해져 감사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저암 유한준의 명문처럼 세상을 잘 알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사랑이리라. 사랑 없인 아무 것도 구하지 못한다. 삶을 사랑하기에 길을 떠나고 보고 느끼고 얻는다. 또 내가 얻은 것을 누군가에게 나누는 것, 그 또한 사랑의 마음이리라. 섬진강의 정수를 보이기 위해 애쓴 이들의 넉넉한 사랑을 느끼며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돌아간다. 그 길에서 만난 아름다운 이들 모두 내겐 소중한 인연이리라.
<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 -이 년 전 진뫼마을을 다녀온 후의 느낌을 적은 글 같이 옮깁니다.
지난 주말 광양의 매화마을로 이른 봄 마중을 나설 때였다. 임실 오수를 지날 무렵 고속도로 아래 저만치 완만하게 휘어져 흐르는 작은 물길이 보였다. 저긴 어디쯤일까. 강물의 유유자적한 그 흐름이 자꾸 어른거려 돌아오자마자 검색 창을 열고 찾아보았다. 이리저리 뒤적이다 알아 낸 곳이 진뫼마을이다. 김용택 시인의 고향이며 섬진강 상류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변 마을이라는 부연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트레킹 일정이 있기에 얼른 신청하고 드디어 오늘 길을 나선다. 새벽 5시 반 이른 시간이다. 꽃샘추위로 한 주 전 보다 오히려 더 쌀쌀하다. 이번에도 활짝 핀 매화를 만나기는 어렵겠다.
강진 옥정호를 지나 순창으로 가는 도중에 일중리에서 내렸다. 턱 버티고 서있는 회문산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맞은편으로 길을 건너 진뫼마을로 들어선다. 연두 빛 움트는 밭고랑 너머로 야트막한 강이 보인다. 섬진강의 상류를 걷고 싶다는 나의 바람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여행지에도 사람과 사람사이처럼 서로 연이 통하는 장소가 따로 있을 거란 생각을 했었다. 눈길이 가고 마음이 머물고 설레임이 향하는 곳, 그런 고장이라면 나와 연이 닿는 곳이 아닐까. 섬진강이 그런 연이 있는 곳이란 느낌이 들곤 했다.
전북 임실군 덕치면 장산리, 진뫼마을의 행정주소다. 한국인의 정서가 흐르는 이라면 이런 평온한 시골 풍경 하나쯤은 유전자 속에 품고 있으리라. 바람결에 묻어오는 두엄 내음과 나무 태우는 냄새가 푸근하고 낯설지 않다. 오래도록 떠나온 고향 길을 걷는 듯 아련함에 젖는다.
마을 입구에서 십여 분가량 걸었을까. ‘김용택’이라 문패가 걸린 집이 보인다. 아직 노모가 기거하시는 시인의 집이다. 서재의 쪽마루에 걸터앉으면 낮은 담장을 지나 강변이 고즈넉하게 시야로 들어온다. 이른 아침 안개 자욱한 강가의 운치를 일생동안 바라보았을 시인, 이토록 평온한 풍경을 누리고 살아온 그는 참으로 축복 받은 인물이다.
조금 더 걸어가려니 조용하던 동네가 웅성거린다. 진뫼마을을 찾느라 이리저리 검색하는 동안 수도 없이 나타나던 김도수란 이가 있었다. 글이며 사진이며 마을과 관련된 여러 곳에서 그의 이름을 만날 수 있었다. 뭐하는 양반인가 궁금하던 차에 이것도 인연인지 광양에 살고 있다는 김도수님이 오셨다. 김용택 시인과는 사촌지간이라고 하신다. 일행 중에 이 분과 수양어머니를 맺은 재미교포가 있었는데 일정에 맞춰 만나러 온 모양이다.
그는 나고 자란 집 뜨락에서 기른 고추와 배추로 담근 김치에 손두부와 막걸리까지 준비하여 낯선 우리에게 넉넉한 인심을 베푼다. 게다가 진뫼마을의 옛이야기며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며 고향집을 다시 사게 된 에피소드를 구수한 입담으로 들려준다. 이렇게 만난 우연도 반가운데 사인한 책까지 선물로 주시고, 이래저래 복 받은 날이다.
그의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 초입에는 7남매 막둥이의 지극한 효심으로 세운 어머니를 위한 사랑비가 있다. 15년 동안 한푼 두푼 정성껏 모은 돈으로 어머니 돌아가신 후 스스로에게 했던 약속을 지켜낸 아들의 자랑스런 선물이다.
평생 손에 흙 묻히고 사신 어머니를 여의자 그의 아버지는 고향 집을 파신다. 12년 만에 고향집을 다시 구입하고 사라진 징검다리를 복원하고 마을 앞 정자나무를 살려 풀꽃상도 받았다. 그리고 고향마을의 지나간 날을 되살리고 가꾸던 긴 시간을 글로 담았다. ‘섬진강 푸른 물에 징검다리’는 그렇게 잠시 떠났던 고향을 향해 부르는 김도수님의 사모곡이다. 자식들에게 대대로 물려주고 싶은 진뫼마을에 대한 간절한 애정을 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런데 김도수님의 추억담에 왜 내 마음이 뿌듯해지는지. 이제 그 어디서 건 옛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쉽지 않은 일을 그가 하고 있었다. 잘하라고 응원하고 싶다. 사라져 가는 풋풋한 고향의 정겨움, 가족을 이어주는 사랑의 끈끈함, 요즘의 세태와는 사뭇 엇갈리는 정서를 애써 지켜내려는 그의 고집스러움을 지지한다.
지치고 힘겨운 날, 고향집 굴뚝에서 솟는 하얀 연기가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목 메어 달려가 편안히 기대고 싶은 곳. 그 곳이 고향 아닌가. 그런 고향이 내게도 아직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그 고향이 아름다운 섬진강변 인심 따뜻한 진뫼마을 같다면 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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