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아직도 겨울잠에 잠겨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산길을 오른다. 발아래로 장진마을과 구량천의 조망이 멋스럽게 내려다보인다. 고만고만한 산군 사이 강을 끼고 우뚝 솟은 천반산은 전북 장수군 진안 오지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다. 섬티교를 지나 섬계산장에서 시작된 산행들머리는 구량천을 오른편에 두고 굽이치는 강줄기를 바라보며 걷는 길이다. 정상인 깃대봉까지는 내리막 없이 꾸준히 고도가 높아지는 능선길이다. 대동계를 이끈 정여립의 전설이 남아있는 산, 훈련 때마다 대동이라 적힌 깃발을 꽂아 병사들의 경쟁을 부추겼다는 육 백 고지의 깃대봉을 향해 간다.
천반산은 정여립을 빼놓곤 말할 수 없는 산이다. 그가 말을 타고 건너뛰었다는 뜀바위며 바둑을 두었다는 말바위,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했다는 한림대 성터, 여기저기에 그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두어 시간 남짓 걸어 잘 생긴 노송 한그루가 휘늘어진 전망바위에 올라선다. 멀리 눈 덮인 덕유능선과 귀를 종긋 내민 마이산이 마주보이고 사방으로 시야가 탁 트인다. 올망졸망한 산 그리매와 진안 곳곳에 깃든 평온한 마을들, 느린 산굽이 사이의 작은 길들과 여유로운 강줄기의 흐름이 눈앞에 펼쳐진다. 덕유산에서 발원한 구량천은 육지 속의 섬 죽도를 품고 흐르다가 합수머리에서 금강의 물줄기를 만난다.
천반산 위에서 바라보이는 봉우리 중에는 정여립의 정적이었던 송익필의 자와 호를 따 이름 붙인 운장산과 구봉산이 있다. 서얼출신인 송익필은 이이, 성혼, 정철과 교류하며 성리학의 거목들을 후학으로 배출한 조선 중기 당쟁의 숨은 중심인물이다. 그의 아버지 송사련은 노비를 살던 좌의정 안당 가문을 역모 죄로 발고해 신사무옥(1521년)을 일으켜 일가를 몰살케 한 악명 높은 이다. 주인집의 전 재산을 차지하고 당상관의 벼슬을 제수 받아 말년까지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 안당을 무고했던 것이 동인들에 의해 밝혀지자 정작 자손들은 다시 환천 되어 파란 많은 일생을 살다갔다. 재야에 숨어서 당쟁에 적극 개입하고 동인을 처절하게 응징할 각본을 써낸 송익필의 트라우마는 그의 기막힌 가족사에서 비롯된 건지도 모르겠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그때의 이야기는 영화와 드라마로 여러 차례 제작되기도 했다. 수 백 년의 시간이 흘렀어도 한 고장의 산과 산봉우리의 이름으로 마주한 채 후대의 구설수에서 척이 되는 신세를 못 면하는 두 사람의 운명이 기구하게 여겨질 따름이다.
산길을 내려와 모래톱 강변에 서서 죽도를 바라본다. 산죽이 무성하게 자라 한 겨울에도 하얀 눈 사이로 깨끗한 대나무 잎이 보인다 하여 죽도라 이름 붙은 이섬에도 사대부 출신 혁명가 정여립의 한이 담겨 있다. 선조 대에 예조좌랑과 홍문관 수찬을 지내며 전도유망했던 그가 군주와 서인의 배척을 받게 된 계기는 이이의 사망 일 년 후 당시 집권세력인 동인으로 적을 옮기면서부터다. 성혼과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스승 이이의 천거로 조정에 나온 그가 서인을 배반한 것이다. 서인의 영수 이이의 사후 나라와 백성보다는 자신들의 당파를 더 중시하는 서인의 편협한 행태가 실망스러워 택한 길이었다. 하지만 성리학적 대의명분을 중시하던 사회에서 이를 불쾌히 여긴 선조와 사림의 눈 밖에 나고 만다. 이에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정여립은 천반산 아래 죽도에 서실을 마련하고 학문과 강론에 힘을 쏟는다. 또한 ‘천하공물설’과 ‘하사비군론’을 내세워 신분의 구별 없이 사람들을 모아 대동계를 조직하고 왜침에 대비하여 병사를 훈련시켰다. 정해왜변 당시엔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으로 대동계의 병사들을 보내 전라도 일대에 침범한 왜구를 무찌르기도 했다.
죽도선생이라 불리던 정여립은 시대를 너무 앞서 갔던 비운의 천재였다. ‘천하는 주인이 없는 공물이고,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왕조체제에 반하는 혁명적인 주장으로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이 외친 공화주의보다 육십 년을 앞선 꿈을 품었다. 그러나 청운의 뜻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송익필과 정철이 주도한, 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의 희생양이 되어 죽도에서 불운한 생을 마친다. 동인의 몰락을 부른 이 음모의 이면에는 선조의 정치적인 정략이 작용하고 있었다. 정여립 모반사건을 빌미로 시작된 기축옥사(1589년 10월)를 두고 단재 신채호는 ‘조선 오백년 제일 사건’이라 한탄했다. 조선조 사대사화의 희생자보다 더 많은 천 여 명의 인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 비극적인 옥사는 삼년 후 임진란의 굴욕을 맞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16세기말 개혁적 선비들의 참혹한 떼죽음은 결국 인재부족으로 이어져 전란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결과를 불렀고, 더 나아가 후기 조선왕조의 쇠락을 부추기는 결정타가 되었다는 재야학자의 주장도 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역모자로 몰리게 되자 이곳 죽도에서 자결했다고 기록되었지만 동소만록이나 송강행록 등을 참고하면 서인이 매수한 이들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고 한다. 기록한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상반된 입장에서 쓰여 진 사료들이기에 역모의 진위와 그가 어떻게 죽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정여립의 한이 서린 죽도에는 그의 일대기만큼이나 만만치 않은 수난사가 있다. 소나무 몇 그루가 그림처럼 서 있는 병풍바위는 제 몸의 가운데가 툭 끊긴 채 절벽이 되어 애달프게 마주 서 있다. 바위를 폭파해 구량천의 물길을 돌리려던 인간의 욕심이 빚은 훼손의 현장이다. 정여립이 새 세상을 꿈꾸며 활약했던 천반산과 죽도에 남은 이 안타까운 사연은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부끄러운 궤적들이 아닐지. 예나 지금이나 어긋난 열망들이 남긴 흔적은 아프고 흉물스럽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 무언가를 남긴다는 의미는 참 무섭다. 자랑스러운 흔적이라면 모를까 부끄러운 흔적으로 남겨진다면? 사라지지 않을 역사로 기억되는 것의 두려움과, 나의 행적이 받게 될 후세의 평가를 두려워할 줄 안다면,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는 이들의 처신이 조금은 조심스러워지지 않을까.
지난 일들이 전설로 남겨진 이 길 위에 봄이 움트고 있다. 마른 가지 위에 도톰하게 새순이 돋기 시작한 나무들. 길 위의 역사는 무한의 시간 속에서 한때의 짧은 꿈으로 스러져가고 무상한 계절 속에서 떨어진 잎 자리엔 새순이 돋아난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이 있다. 세상은 그렇게 빈 자리에 또 새로운 것들로 채워지는 것, 그것이 인간사와 자연의 순리인가 보다. (정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