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추억

가평 가는 길

정진숙 2015. 2. 25. 14:24

 

어딘가로 향하는 떠남에는 늘 어떤 기대감을 갖게된다.

이 길을 얼마나 자주 오갔던가. 혼자여도 좋고 벗들과 함께여도 좋은 길. 가평으로 가는 길은 언제라도 마음 설렌다. 새 움 트는 이른 봄날과 바람 부는 여름 오후에 늦은 가을과 어느 겨울날에, 맑은 날 궂은 날을 가리지 않고 가평의 사계를 찾았다. 좋아하는 곳을 향해 가는 것이기에 그날의 일기가 어떠하건 마음 정하면 주저 없이 길을 나서곤 했다. 몇 번을 거듭 가도 지루하지 않은 이 길을 또 가고 있다. 경춘선 기차를 타고 차창 밖을 내다본다. 겨울풍경 속 텅 빈 들판이 훈훈해 보인다.

 

용산역을 출발한지 한 시간여, 가평역에 도착했다. 맑은 공기가 상쾌하게  코끝을 스친다. 늦겨울 햇살은 봄볕마냥 포근하다. 경반계곡을 끼고 있는 칼봉산휴양림이 오늘의 목적지이다. 숲속의 집에 배낭을 내려놓고 가벼운 산책길에 나선다. 산등성이에 듬성듬성 남은 잔설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올 겨울은 유난히 눈이 드물어서인지 하얀 눈의 흔적들이 반갑다. 응달진 곳은 빙판이 져 멀리 올라가진 못하고 나무 데크를 설치해 둔 계곡 옆길을 잠시 걷는다. 누군가가 만든 재밌는 표정의 눈사람 셋이 나무 벤치에 놓여 있다. 아이들처럼 깔깔거리며 상상의 나래로 이야기를 지어본다. 한 겨울 산중의 여유로운 시간,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어찌 보면 심심하리만치 한적한 이 겨울을 즐긴다.

 

이른 저녁식사를 마치고 윷놀이를 시작한다. S님이 작은 나뭇가지로 윷을 만들었다. 급조한 윷이 만들어준 유쾌한 놀이시간, 정말이지 원없이 웃는다. 오롯이 놀이에만 몰두하던 때가 언제였나. 배가 아플 정도로 웃으며 꽉찬 생각들을 비울 수 있어 좋았다. 밤이 되자 겨울 산의 시린 위풍이 나무 벽을 파고든다. 두런두런 이야기꽃 피는 통나무집에 스며드는 찬바람을 몰아내고 사람의 온기로 가득 채운다.

 

밤하늘이 담긴 천창으로 반짝이는 별이 보인다. 불을 끄고 다락방 창가에 삼삼오오 얼굴을 맞댄다. 깜깜한 하늘 위 쏟아지는 별빛 달빛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볼 양으로 옷을 챙겨 입고 숲으로 나선다. 싸한 밤공기가 달콤하다. 산을 좋아하기에 계절마다 휴양림을 찾곤 한다. 그런 때면 늘 갖곤 하는 한 가지 바람이 있다. 별을 보고싶다는 소망이다. 이번엔 별을 꼭 보아야 할 텐데. 별을 향한 사그라지지 않는 갈망은 무엇 때문일까. 그리움, 순수, 이상, 영원....... 마음 안에서 잃어가는 이런 감상적인 단어의 의미들을 별이 상징하는 이미지에서 찾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한 겨울의 청명한 별밤에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별을 품고 한사람 두사람 잠을 청한다. 다락방 창가에 깃든 밤을 폰카에 담던 K님이 살며시 일어나 커튼을 닫는다.

 

산등성이 위로 파스텔 색의 연한 새벽 햇살이 번지고 있다. 창가에 맺힌 서리가 녹아내리는 걸 오랜만에 본다. 커피 한잔을 마시고 서둘러 문밖으로 나왔다. 이른 아침 짜릿한 냉기가 살갗에 닿는다. 자그마한 상고대가 나무펜스 위에 소복히 피어있다. 어제와는 또 다른 풍경, 햇살 드는 겨울 숲의 아침이 고즈넉하게 열리고 있다. 앞서 나온 Y님과 J님이 연신 셔터를 누른다.

코드가 비슷한 이들과의 여행은 여러 면에서 즐겁다. 길을 나서며 잡음이 아주 없기란 힘들기 마련인데, 소소한 생각의 다름이 있을지라도 큰 엇갈림 없이 뜻을 맞출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을 함께 나누는 인연이란 그리 흔한 인연은 아닐 것이다. 배움과 여행하는 시간을 오래도록 공유하며 지금껏 이어온 문우들과의 소중한 만남이다. 서로의 감성이 맞아 이렇게 어우러질 수 있음은 큰 축복이다. 귀한 인연들이다.

 

돌아오는 길에 두물머리를 찾았다. 강은 참 많은 이야기를 품는다. 바라보는 이들의 눈에 제각각 서로 다른 것을 읽게 하는 마법의 강. 시인이 아니어도 시인이 되게 하는 상념의 강. 어디를 보아도 풍경이 되는 그 강을 바라보며 자기만의 색을 더해 자기만의 그림을 그린다.

날 저무는 강가에 서서 일몰을 기다린다. 어둠이 내리는 강가에서 오늘이 사위어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추위에 떨며 기다리는 일몰. 모두가 빛이 이끄는 곳을 향하고 있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무언가의 대가가 필요하리라. 기다림에는 헛됨이 없다. 언 강물 위를 비추는 붉은 석양은 긴 잔영을 남기며 내일 다시 떠오를 소망을 품은 채 강 너머로 기운다.

오늘은 어제로 소각되어 가는 시간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많은 날 중 오늘이란 시간만이 유의미할지 모르겠다. 지나간 어제도, 추상적인 내일도 아닌, 오늘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한 시간일 것이다. 좋은 이들과 함께한 지금 이 순간이 일몰과 더불어 추억으로 고요히 저물고 있다.(2015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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