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읍내에서 출발해 천은사로 향하는 길이다. '방장산천은사'라 적힌 산문을 지나간다. 방장산은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이다. 중국의 전설에 의하면 발해만 동쪽에 신선이 사는 신성한 삼신산이 있다고 전한다. 진시황은 그 산에서 나는 불로장생 초를 구하기 위해 삼만의 동남동녀를 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실종되어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마도 우리 조상 중의 누군가로 이 땅 금수강산에서 한 생을 살다 떠났을 것이다. 그 전설의 삼신산이 봉래산(금강산), 방장산(지리산), 영주산(한라산)이다.
영산 지리산이 품은 3대 사찰에는 화엄사, 쌍계사, 천은사가 있다. 그 중 인근 두 사찰의 화려한 명성과는 달리 천은사는 오랜 역사에 비해서 너무도 고적한 절집이다. 단청 벗겨진 일주문과 종루, 요사채의 고색창연함에 봄이 한창인 이 계절에도 경내는 적막감이 감도는 듯하다. 은은히 울려 퍼지는 풍경소리만이 산자락에 이는 바람의 존재를 전하고 있다.
신라 흥덕왕 828년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온 덕운스님에 의해 창건된 천은사는 그보다 앞선 544년에 화엄사와 같이 지어졌다는 설도 있어 창건 연대가 명확치는 않다. 절 마당에서 솟아나는 차고 맑은 샘물이 달다 하여 감로사라 불리던 천은사. 샘의 물을 마시면 흐렸던 머리가 맑아져 지혜를 깨우치게 된다는 소문에 한때 천여 명의 스님이 기거하기도 했다. 고려 충렬왕 때는 남방제일선원으로 칭해지기도 했던 유서 깊은 고찰이다.
감로사에서 천은사로 절 이름이 바뀐 데에는 전설이 있다. 임진란의 화재로 소실 된 절을 숙종 때 단유선사가 중수할 무렵이다. 절의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니 한 스님이 용기를 내어 구렁이를 잡아 죽인다. 문제는 그 이후로 샘에서 물이 솟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샘이 숨었다’는 뜻의 천은사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절 이름을 바꾸고 가람을 크게 중창 했지만 절에는 여러 차례 화재가 발생하는 등의 불상사가 끊이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은 입을 모아 절의 수기(水氣)를 지켜주던 이무기가 죽은 탓이라 하였다. 얼마 뒤 조선의 4대 명필가의 한 사람인 원교 이광사(1705~1777)가 절에 들렀다가 이 소식을 들었다. 이광사는 마치 물이 흘러 떨어질 듯한 필체[水體]로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써 주면서 이 글씨를 일주문에 현판으로 걸면 다시는 화재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사람들은 의아해 하면서도 그대로 따랐더니 신기하게 이후로는 화재가 일지 않았다고 한다. 이광사의 현판이 걸린 천은사 일주문 일대는 그 주변의 풍광이 아름다워 절경으로 이름 나 있다. 일주문 아래에서 가만히 귀 기울이면 현판글씨에서 고요히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는 후문도 있다.
일주문을 지나 잠시 오르면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위로 무지개다리가 놓여 있다. 이 계곡 위에 놓인 다리를 피안교라 부른다. 피안이란 온갖 번뇌에 휩싸여 생사윤회 하는 고해의 이쪽 건너편에 있는 저쪽 언덕을 뜻하는 말이다. 아무런 고통과 근심이 없는 불, 보살의 세계다. 열반의 저 언덕에 도달하기 위해 건너는 다리, 피안교를 건너는 것은 세속의 마음을 청정하게 씻어버리고 이제 진리와 지혜의 광명이 충만한 불, 보살의 세계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그 다리 위에 2층 누각인 수홍루가 있다. 누각은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인 2층으로 조선후기에 만들어졌다(천은사 홈페이지에서).
계곡과 어우러진 수홍루는 천은사를 대표하는 경치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답다. 수홍루 아래 피안교에서 바라보는 천은제는 한없이 고요하다. 지리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길이 계곡을 지나 일주문 앞에 모여 호수를 이루었다. 산과 물과 절집의 절묘한 어우러짐이 이곳이 그대로 피안임을 느끼게 한다.
오래 전 여름 한밤에 노고단을 가기 위해 성삼재로 오르는 길을 달리고 있었다. 잠결에 문득 깨어나 울울창창한 숲의 기운에 도취되어 여기가 무릉도원 가는 길인가 하며 비몽사몽 창밖을 바라보던 기억이 난다. 지리산을 오르기 위해 이곳 ‘한국의 아름다운 길’을 여러 차례 지나갔건만 그 길 위에 있는 이 고적한 산사를 이제야 만난다.
계단 위 천왕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간다. 절 마당에는 수령 300년의 보리수나무가 한그루 서있다. 불자와 수도승들에게서 유명한 것은 바로 이 보리수라고 한다. 이곳의 보리수나무 열매는 길쭉하지 않고 동글동글하다. 게다가 염주를 만들기에 꼭 알맞은 크기로 색이 연하며 가볍고 단단하다. 천은사 보리수 열매로 만든 염주는 품질이 좋고 소리가 좋아서 아주 귀하게 여겨진다. 밝은 색의 염주는 시간이 지나 손때가 묻으며 점점 갈색으로 변해간다. 짙어가는 염주 빛깔만큼 불자들의 불심도 깊어가지 않았을까.
경내를 한 바퀴 돌아 내려가는 길에 천은제를 바라본다. 지리산자락이 온화하게 비친 물가에 잔잔한 파문이 일렁인다. 벚꽃 잎 한들한들 나부끼는 사월, 가지 끝에 연초록 잎사귀 뾰족이 내미는 봄날이 수면위에 내려앉았다. 무심하게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도 편안해지는 풍경이다. 산 아래 세상은 시끄러운 일투성인데 세상 밖 이곳은 이렇듯 피안이다. 그러나 내가 살아갈 곳은 저 아래 세상이다. 가슴 한켠에 피안을 품고서 다시 산을 내려간다. 사람의 마음 안에 모든 게 있으니 머무는 곳 어딘들 피안이 아닐 리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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