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어느 평범한 날의 일몰

정진숙 2016. 10. 16. 19:45


산사의 뜨락에 가을이 내려앉았다.

하늘은 저만치 높고 낙가산 산자락이 손에 닿을 듯 다가선다.

조금씩 붉은빛을 띄우기 시작하는 나무들

시간은 영락없이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석모도 보문사를 찾는다.

섬 안의 절집도 세상이 변하는 흐름에 예외일 순 없나보다.

사라져버린 여유로움과 고즈넉함이 못내 아쉽다.

 

보문사는 과거 육영수여사가 기거하고 사후 안치된 곳으로 유명하다.

이 절집을 오기까진 꽤 험한 길이었으리라.

복잡한 김포 길을 지나서 강화로 가는 배를 타고 들어와야 하는 제법 먼 길이다.

중학교 때 같은 반 친구 하나가 강화에 살았다.

그 아인 토요일 방과 후면 본가에 가고 일요일 오후엔 학교근처 하숙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동대문구의 학교에서 강화까지 매일 통학하기엔 멀어서였다.

혼자 하숙하던 그 친구의 자유로움을 많이 부러워했던 생각이 난다.

 

세월은 가고 산사도 변하고 찾는 이들도 달라졌다.

변해버린 절집에는 오늘도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영험하기로 이름난 소원바위인 눈썹바위는

지금은 한창 보수공사중이다.

낙조가 아름다운 그곳에서의 조망은 포기해야할 모양이다.

 

일몰 전의 긴 반영이 서해바다를 붉게 물들이고 있다.

윤슬의 눈부심이 금빛으로 살랑거린다.

밀물이 밀려드는 갯벌 위에도 저녁햇살이 반짝인다.

해 저무는 바다를 바라보면 이유 없이 처연해진다.

모든 지는 것들의 슬픈 속성 때문일 것이다. 


장화리 낙조마을로 서둘러 향한다.

허둥지둥 찾아온 곳, 어디가 일몰 포인트인지 알 수가 없다.

길을 여러 번 돌려 간신히 도착한 해넘이 마을 둑길

아, 말갛게 불타던 해는 허망하게 해무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기대는 순식간에 소멸되고 만다.

상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

사진작가들의 작품처럼 멋진 풍경을 그렸었다.

어이없는 일몰은

안타까움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간신히 붉은 기운만 남긴 낙조를 망연히 바라보다가

빈 들판을 가로질러 걷는다.

벼 벤 자리 뾰족한 고랑 사이에서 풀내음이 난다. 

가을걷이 하고 난 논밭에 대한 추억이 도회지 태생인 내겐 없다.

언젠가 추수가 끝난 논을 쳐다보며

숙제를 모두 끝마친 개운한 기분이 든다고 했던 적이 있다.

빈 들판에서 농부들의 홀가분한 마음이 왠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뭔가 시원하고도 허전한 그 느낌이.

 

하릴없이 이리저리 소요한 하루가

복잡한 머리를 비우게 만든다.

생각 버리기,

내 앞의 풍경에 집중하다보면 생각은 저절로 버려진다.

강화나들길 조명등이 하나둘 불을 밝힌다.

집으로 가야할 시간이다. 

 

어느 특별한 날보다

많은 평범한 날들의 조합이 삶이란 생각이 든다.

멋진 낙조를 그리며 도착한 이곳에서

기껏 만난 건 아주 평범한 날의 일몰이다.

집으로 가는 길,

그래도 마음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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