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한국의 길

대관령 옛길

정진숙 2017. 2. 17. 17:48

나의 여행벽은 꽤나 오랜 지병이다.

초등학교를 다섯 번 전학한 이력이 어쩌면 한 몫 했을 지도 모르겠다.

일 년에 한 번씩 도시를 옮겨가며 초등학교 6년을 마쳤다.

아버지의 사업 소재지를 따라 대구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다시 대구로, 그리고 서울로.

마지막 종착지는 서울이 되었다.

서울에 정착한 이후로는 병 아닌 병이 생겼다.

한 곳에 오래 머무는 것에 대한 불안정감, 떠나지 못하는 붙박이의 갑갑증 같은 것이 생겨났다.

나름대로 내린 처방은 이웃동네 구경하기나 버스 타고 종점가기였다.

목적 없이 이리저리 기웃대며 떠남에 대한 갈증을 조금씩 풀었던 것 같다.

 

수학여행 이후 처음 떠난 여행은 직장 야유회에서였다.

여행이라 말하기도 멋쩍었지만 어딘가로 멀리 가는 것이 무턱대고 좋았다.

대관령 고개 넘어 외설악으로 가는 가을 야유회.

어린 시절 소풍가는 날의 기다림보다 더 설레는 맘으로 이 날이 오기를 손꼽았다.

 

10월 첫 주 영동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새파란 가을하늘을 올려다보고 또 보고

차창밖을 한없이 내다보았다.

문막을 지나 강원도 경계를 넘을 즈음엔 가슴이 벅찼다.

열아홉 살 사회초년생이던 그때, 처음 본 대관령휴게소가 잊혀 지지 않는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과 맑고 차가운 가을바람

휴게소 광장으로 울려 퍼지던 목소리를 위한 협주곡은 천상의 소리처럼 들렸다.

너무도 완벽한 가을날이었다.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진 넓은 초원은 본 적 없는 알프스의 초원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이날의 기억은 설악산도 동해바다의 풍경도 아닌 대관령의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강릉으로 가는 빠른 도로가 생겨 이제 옛길은 일부러 찾아가야 하는 구 길이 되었다.

굽이굽이 돌아 느리게 가는 길의 여유로움은 이 시대의 감성은 아닌 모양이다.

구 길에서 새 길을 내려다보면 여러 가지 감회가 엇갈리게 된다.

속도를 향한 목마름은 그칠 줄 모르고 사라지는 것의 아쉬움은 모른 척해버린다.

오로지 빠른 것만이 최선일까 싶기도 하다.

뻥뻥 뚫린 길을 달리다 보면 나쁠 것도 없겠지만 풍경을 보고 느끼는 여행의 낭만 또한 없다.

목적지까지의 짧아진 시간을 얻은 만큼 잃은 것 또한 많지 않을까.

 

대관령 옛길은 예부터 유서 깊은 고갯길이었다.

율곡 이이가 한양으로 과거시험 보러 가는 길에 곶감 백 개를 들고 가며

한 굽이 지날 때마다 하나씩 먹었다고 한다.

대관령을 다 넘고 보니

아흔 아홉 개를 먹고 한 개가 남았다 하여 ‘아흔 아홉 구비’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지난 1월 제왕산을 넘어 솔향 가득한 이 길을 걸었다.

옛길을 걸었던 수많은 옛 사람들.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 걸으며 뭉클하던 순간이 떠오른다.

 

대관령 옛길은 옛 사람을 만나러 가는 여행길이기도 하다.

고개 넘어 강릉에서 사임당도 만나고 율곡도 만나고 허난설헌도 만난다.

그들에 공감하며 과거의 시공간으로 내면의 지평을 넓혀가는 길이다.

그 길을 가는 동안 나의 옛 추억도 만나게 된다.

 

대관령 길은 산도 만나고 바다도 만나는 설렘의 길이기도 하다.

고개 넘어 강릉에는 솔향 우거진 숲도 있고 파도 넘실대는 동해 바다도 있다.

서울에서 2시간 반, 서늘한 대관령을 넘으면

가슴 시원하게 내달리는 바닷길 7번국도를 지나 그 모든 것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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