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천왕봉을 맨 처음 올랐던 그 여름을 기억해본다. 아이 키우다 재취업 하고 서너 해 지난 무렵이다. 더는 이 직업으로 밥먹게 될 일은 없을 거라 호언장담 하며 떠난 직장이었다. 그런 직장에서 다시 일하는 기분은 취업에 대한 고마움보다 자괴감이 더 크게 만들었다. 삶이 더 나아지기는커녕 왠지 이전으로 퇴보한 듯 패배감마저 들던 차였다. 우연히 회사게시판에 붙은 천왕봉 산행공지를 보게 되었다. 사내 등산동호회에 가입한 상태도 아니어서 망설이다가 인사부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흔쾌히 동행해도 괜찮다는 말을 듣고 가슴 두근거렸던 생각이 난다.
그리곤 수도 없이 올랐던 지리산이다. 딱히 무어라 말 못할 답답함이 나를 에워쌀 때면 천왕봉을 처음 오르던 날이 눈앞에 그려진다. 팍팍하고 고된 백무동길을 숨가쁘게 오르고 있는 그때의 내가 보이며 아무 것도 생각지 않고 가파른 고갯마루를 발끝만 바라보고 걷던 가열찬 몰입의 그 순간이 떠오른다. 그래서 삶의 별 거 아닌 고비마다 인생의 고갯마루 하나를 넘듯이 그렇게 지리산 봉우리 하나하나를 넘었던 게 아닐지.
일 년에 두어 번씩 이 십여년을 넘게 오르내린 산길이다. 주능선 봉우리와 골짜기 곳곳을 많이도 걸었다. 한 번쯤은 그 길들을 모두 아우르고 싶은 욕심이 늘 맘속에 있었다. 때마침 긴 휴가를 얻어 무작정 도전하게 된 지리산 종주다. 가슴 뛰는 그 산길로 간다.
<1일차; 성삼재에서 연하천대피소까지 13키로>
8월 7일 새벽 3시 5분이다. 수원역에서 어젯밤 출발한 기차를 타고 구례구역에 도착했다. 역전에 미리 와있던 구례터미널 경유 성삼재행 버스로 갈아타며 지리산 종주 첫 스타트를 무사히 끊는다. 터미널까지 버스요금 천원을 내고 성삼재에 하차하며 추가요금 사천 오백 원을 더 낸다.
3시 40분에 구례터미널을 출발한 버스는 화엄사 입구에 한 번 정차한 후 사십 여분 오르막길을 올라 성삼재에 도착했다. 이 새벽에 버스는 거의 만석이었다. 화엄사 입구에서 청년 하나가 내리고 젊은 남녀 두 사람이 새로 탔다. 야심한 이 시각에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지리산자락을 맴도는 열혈 청춘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4시 반경, 지리산 서편 능선 위에서 밝은 보름달이 성삼재 밤하늘을 훤히 비추고 있다. 쏟아질 듯 빼곡한 별무리를 보려던 내 소원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망연히 하늘을 올려다보곤 노고단을 향해 아쉬운 발걸음을 뗀다.
울창한 여름 숲에선 어느새 소슬바람이 불고 있었다. 올 여름내 폭염으로 지친 심신에 생기를 되찾아줄 만큼 청량한 바람이다. 입추인 오늘 천 사백 고지 지리산정에선 벌써 가을 냄새가 배어난다. 한 시간여 편안한 길을 올라 노고단대피소에 도착했다.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마치고 본격적인 산행 준비를 한다.
운무 자욱한 노고단에 서서 지리 8경인 노고운해를 보는 행운은 만나지 못했다. 천왕봉 가는 길 25,5키로 시그널을 통과한다. 주황색 동자꽃과 남보라빛 투구꽃, 분홍빛 이질풀과 하얀꽃잎의 참취가 지천으로 핀 노고단고개 길은 야생화 천국이다. 녹음 짙은 숲길의 운무 속에서 기분 좋게 발걸음을 옮긴다.
돼지령 즈음에서 일출을 볼 수 있으려나 기대했지만 짙은 운무로 일출도 놓치고 만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피아골삼거리를 지나 임걸령샘에 도착했다. 완만한 능선을 걷다가 노루목을 지나며 삼도봉 까지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만난다. 슬슬 난이도가 높아짐을 실감하는 길이 삼도봉에서 화개재 너머 토끼봉, 명선봉까지 이어졌다.
첫 1박지 연하천대피소에 이르는 명선봉 마지막 2키로는 마의 구간이다. 거의 백 미터마다 한 번씩 숨을 고르며 간신히 대피소에 도착했다. 처음 노고단을 출발할 때의 선선함은 사라진 지 오래고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연하천 짜릿한 샘물 서너 바가지를 머리에 퍼부으며 정신을 가다듬는다.
이른 저녁을 먹고는 방금 전의 고됨은 모두 잊은채 새롭게 전의를 불태운다. 내일은 더 수월할 거라며 한밤 자고나면 오늘의 고단함은 깨끗이 가실 거라며 서로를 다독이곤 대피소 침상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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