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순간을 얼마나 오래도록 꿈꾸었던가. 시베리아항공 인천발 블라디보스토크행 S7 556편기. 동토의 왕국으로 우리를 데려 갈 비행기가 눈앞에 있다. 흑백TV로 본 주말의 명화 한편으로 시작된 단발머리 여중생의 조금은 허황했던 꿈. 눈 덮인 설원을 달려보고 싶다는 막연하던 소망이, 기약도 형체도 없던 그 몽상이 현실로 되기까지 수십 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기우제를 올리면 반드시 비를 내리게 하고야만다는 인디언추장의 비결은 비가 내릴 때까지 끝까지 소원을 빈다는 것. 이룰 때까지 바라고 꿈꾸면 이루어지는가보다.
저녁 6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블라디보스토크공항에 비행기는 착륙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시발점이자 종착지인 블라디보스토크 역으로 이동하기 전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최후의 한식을 즐긴다. 두근거린다. 미지의 이 나라에서 어떤 풍경들을 만나게 될지. 고풍스런 유럽풍의 역사에 앉아 0시 51분발 이르쿠츠크행 열차를 기다리던 밤의 설렘이 벌써 그립다.
영화 닥터지바고에서 마차를 타고 하얀 설원을 달리던 라라와 지바고처럼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눈 덮인 평원을 만 사흘하고도 네 시간을 달려 시베리아의 파리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새벽 3시 7분, 하얗게 안개 피어오르던 이르쿠츠크 역 플랫폼은 상상으로 그려보던 북국의 그 풍경이었다. 영하 27도를 알리는 전광판의 빨간색 시그널이 혹한의 도시에 발 디뎠음을 알린다. 하바롭스크, 벨라고르스크, 에로뻬이 빠블로비치, 치타, 힐록, 울란우데... 정차하는 역의 플랫폼에 내려설 때면 완벽한 스카이블루의 하늘과 얼음장 같이 차고 맑은 공기가 중무장한 온몸을 감싸곤 했다. 낮이면 끝도 없이 이어진 자작나무 숲길을 달렸고 밤이면 총총한 별 무리에 홀려 잠을 잊은 채 차창 밖 암청색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페트로브스키 자보드 역, 낯선 이국의 역을 지나며 전해들은 데카브리스트들의 실패한 혁명이야기는 동토 시베리아가 유형의 땅임을 실감케 해준다. 그러나 나에게 주어진 자발적인 이 유배의 시간은 고난이 아닌 오롯한 행복이었다.
열차 카페 칸에서 진행된 이틀 밤의 인문학 강의는 이번 일정을 여행과 문화가 어우러진 품격 있는 여행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특히 우먼센스 이정식 대표님의 중저음 보이스로 들려주신 러시아국민음악 백학의 묵직한 울림은 아직도 여운으로 남았다. 이 곡은 드라마 모래시계의 삽입곡으로도 유명한 곡이다. 일곱 명의 아들을 하나 둘 전장으로 떠나보내고 아들 모두를 차례로 주검으로 맞은 어느 어머니를 기리는 노래. 코카서스 산맥 인근 작은 공화국 오세티아가 원곡의 배경이라며 노래에 감동한 오세티아인 매니저가 전하는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더해져 뭉클한 순간을 연출했다.
이르쿠츠크를 출발해 알혼섬으로 가는 바이칼투어일정은 더더욱 가슴 설레게 만들었다. 시베리아의 푸른 눈 바이칼. 지구상에서 가장 깊은 호수의 얼어붙은 수면 위를 걷게 되다니. 한국인과 유전자 99프로가 일치한다는 부리야트인 자치구의 드넓은 구릉지를 서너 시간 달려 샤후르따 선착장에 도착했다. 예정에 없던 공기부양정까지 타는 뜻밖의 체험을 보태며 군용차량을 개조한 우아직에 탑승한다. 흙먼지 날리는 알혼섬의 길 양편, 야트막한 언덕은 키 작은 마른 풀들로 가득하다. 원시의 풍경이 저렇듯 황막하지 않았을까. 파랗게 새잎 돋을 봄이 과연 올까 싶게 황량해보이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광활한 황토 빛에 묻힌 작은 마을의 한적함은 보이는 그대로가 힐링이다. 누군가에겐 일상인 그 풍경이 담백한 위로로 다가왔다.
샤먼의 성지 부르한바위의 일몰을 보고 후지르마을 빌라말리나에서 알혼섬에서의 첫 밤을 보냈다. 우아직으로 바이칼빙상투어를 하는 아침, 짙푸른 호수 위를 얼마쯤 달렸을까. 아무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조차 궁색해진다. 한민족 시원의 언덕 기슭 끝없이 이어진 2,500만 년 전의 호수 바이칼 위를 달리고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물결이 그대로 얼어붙은 호수변의 얼음조각과 하보이곶 풍경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바이칼의 벅찬 감동을 안고 돌아온 빌라말리나에서 시베리아, 바이칼, 보드카 그 모든 것에 완패한 알혼섬의 둘째 날 밤을 보내고 이르쿠츠크로 향한다.
여전히 청명한 날씨가 일주일째 이어졌다. 축복받은 이 여행이 감사할 따름이다. 막연히 두렵게만 여겼던 시베리아여행의 길을 열어주신 우먼센스 이정식대표님과 BK여행사 박대일대표님, 박상필가이드님과 박하향인솔자님, 그리고 스물 세 분의 동행께 무한 감사드린다.
이르쿠츠크 시가지와 앙가라강변을 둘러본 마지막 날 밤 카톨릭교회에서 오르간 연주회를 감상하는 일정이 추가되어 인문기행의 대미를 멋지게 장식했다. 7박 8일의 여정을 마치고 메리어트호텔을 출발해 공항으로 가는 아침 버스 안에서 이르쿠츠크국립대를 졸업한 박상필가이드가 의미심장한 스토리를 들려준다. 자신에게 제 2의 고향인 이르쿠츠크는 신기한 도시라고. 밀어내고 밀어내도 다시 밀려오는 바이칼의 물처럼 다시 이 도시를 찾게 만드는 마법의 도시라고.
시베리아? 이 추운 겨울에 거긴 왜? 지인들의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남들 눈엔 다소 이상해보였을 이유들이 겨울 시베리아로 이끌었다. 너무 추워서 바이러스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혹한의 땅에 사람들이 앙버티고 살아간다. 유형의 땅, 그 동토 위에 혁명가 데카브리스트들이 불꽃같은 열정으로 피워낸 문화가 풍성하게 살아있다. 일제 강점기 선열들의 눈물겨운 삶과 독립운동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낡은 배낭 속에 소설 닥터지바고 한권과 낡지 않은 꿈을 담고 걸었던 그 길에서 또 다른 시베리아를 꿈꾸며 돌아왔다. 새로 만날 겨울과 봄, 여름, 가을의 그곳을. 여행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슬그머니 불안해진다. 어느 새 마법에 걸린 건 아닌지. 밀어내고 밀어내도 다시 밀려드는 바이칼의 주술에 벌써 빠져버린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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