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한국의 길

기차로 떠나는 북트레킹, 대구

정진숙 2021. 9. 17. 11:48









1.
광역도시 대구를 말해주는 많은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독서의 계절 가을, 소설을 통해 대구를 만나보는 북트레킹을 떠납니다.
김원일의 소설 <마당 깊은 집>은
1988년 초판 이후 재판과 보급판까지 총 500만부가 넘게 판매된 스테디셀러입니다.
도서 판매량이 어마어마했던 걸로 미루어보아
예전엔 지금보다 독서인구가 많았었나 봅니다.

이 소설은 대구 시내를 배경으로
전쟁 후 서민의 고달픈 삶을 잘 그려낸 수작으로
전후세대의 많은 공감을 받은 작품입니다.
스토리는 오래 전 MBC드라마로 방영되었던 작품이라
소설을 읽지 않은 분들도 한번쯤 보았을 법한 내용입니다.

불과 얼마 전 우리의 일상이기도 했던 시절
근세 우리 시대의 자화상 같았던 소설 속 장소로
잠시나마 타임슬립 해봅니다.

2.
어린 시절 살았던 대구 남산동에서 계산동 청라언덕까지는 큰길 하나 이웃한 거리였다. 가까운 곳에 근대 태동기의 한획을 긋는 역사적 장소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았으니 참으로 무심한 세월을 살다가 고향을 떠났다.

그 무렵을 돌아보면 청라언덕이나 3.1만세 운동길이 있는 근대골목 보다는 동산동 맞은 편 서문시장길에 남다른 감회가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서문시장은 당시에도 전국 몇 손가락 안에 꼽는 굉장히 큰 규모의 도매시장이었다. 어머니의 삯바느질 거래 점포가 있어 심부름으로 무시로 들렀던 시장이다.

한복 두어 벌을 싼 보자기를 들고 축 처진 어깨로 어기적거리며 걷던, 옷가게 빼곡한 좁은 통로들이 선연히 그려진다. 사람들 틈사이를 비집고 걸을라치면 화학섬유 특유의 매케하고 독한 냄새가 눈을 시리게 했다. 한손으로 코를 막고 숨을 참으며 실눈을 뜨고 요령을 피워봐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겨우 열살 남짓 나이에 눈물 찔끔거리며 걷던 서문시장길은 어머니에게도 내게도 모두에게 힘겨웠던 추억길이다.

한겨울 날 심부름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어둑해진 큰길을 터덕터덕 걷다보면 괜스레 마음 아득해지곤 했다. 마당깊은 집 길남이처럼 너무 이른 나이에 살아감의 고됨을 어설프게나마 알게 된 탓이다. 김원일의 소설을 다시 읽으며 주인공 길남에게 빙의되어 마치 내모습을 대하는 듯 내내 짠하고 애처로웠다.

떠나온 지 수십 년, 고달픔만 가득해도 고향은 고향이다. 가끔씩 그리움 절절해져 사회과 부도를 펼쳐놓고 대구 곳곳을 그려보곤 했었다. 황토 먼지 풀풀 날리던 신작로 따라 달성공원 가던 길이며 할머니 손잡고 걸었던 칠성시장 길이, 펼쳐진 지도 위로 아른거렸다.

어느 해 찾았던 대구는 전혀 알 수 없는 새로운 곳으로 변해 있었다. 근대골목의 몇몇 유적만 그대로고 시내는 어디 한 곳 익숙한 데가 없었다. 고향에 대한 애증의 시간을 지나온 동안 고향 또한 고향 아닌 곳으로 변심하고 말았나 보다.

이제는 대구가 고향이라 말하기도 무색하게 고향과는 동떨어진 채 오랜 세월이 지났다. 여행지로 찾아가는 고향 대구, 내 놀던 옛 동산을 어떤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될지.


2018. 10.
동대구역-김광석길-서문시장-청라언덕-이상화고택-진골목-사문진나루터-동대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