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이 있어 시내로 가던 날이다. 종각역에서 내려 광화문 쪽으로 걷다가 피맛골 위에 세워진 새 빌딩들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휘황한 불빛으로 번득이는 건물들을 쳐다보며 소박하게 정감이 흐르던 청진동과 피맛골 골목을 떠올렸다. 등하교 길에 종종걸음으로 이 골목을 지나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그 길이 모두 사라지고 말다니. 종로와 광화문 일대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나는 볼 적마다 달라지는 이 거리의 풍경이 반갑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날들은 추억일 뿐이고 변화를 향한 시대의 흐름을 어쩌랴 하는 무력감이 들었다.
문득 얼마 전 웹 서핑을 하다 읽은 기사가 생각나 주변을 유심히 둘러보았다. 재개발 구역에서 기초공사를 하던 중 조선시대의 유적지가 발견되어 일부를 그대로 보존했다는 기사였다. 그게 어디쯤일까 두리번거리다가 건물 옆으로 인도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 꽤 넓은 면적의 공터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뜻밖의 공간이었다. 발굴된 피맛골 옛 터를 강화유리로 덮어 일반인들이 볼 수 있게끔 배려한 공간이다. 건물 외벽에는 종로의 역사에 대한 기록물과 유물을 전시한 곳도 있었다.
오랜 시간과 모진 세월을 꿋꿋이 견뎌낸 서울의 흔적들이 더는 훼손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늘 간절했다. 우리의 많은 문화유적을 우리 손으로 부수고 허무는 현장을 대할 때마다의 자괴감을 다소나마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뜻밖에도 피맛골 옛 터를 보존한 공간을 보게 되니 더 없이 반갑다. 금싸라기 같은 이 부지를 시민을 위해 제공한 사업자의 용단이 대단하게 여겨진다. 유적지를 대하는 기업인의 인식과 문화의식이 조금은 변화된 것 같아 기뻤다. 이 공간은 문화 메신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다하며 기업홍보에도 좋은 시너지효과를 얻고 있다고 한다. 비록 조선시대 운종가의 긴 역사를 모두 복원한 건 아니더라도 이렇게나마 남겨두었음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문화재보존과 개발이란 상충된 화두가 조금씩 바람직한 상생의 해법을 찾아가는 것 같아 안도감이 든다.
지구촌 시대라고 말할 만큼 세계가 좁아졌고 문화의 경계도 점점 흐려져 가고 있다. 그럼에도 그 도시는 그 도시만의 유일한 이야기가 있고 그 나라는 그 나라만의 고유한 역사가 있다. 그런 개개의 독특함들이 그 도시와 그 나라를 찾고 싶은 마음을 생기게 만든다. 세계 어디를 가든 똑같은 거리와 풍경을 만나게 된다면 귀한 시간과 돈을 들여 먼 길을 떠날 이유가 있을까. 조금이라도 차별된 그 무엇이 있어야 이목을 끌 수 있을 것이다.
몇 차례 다녀온 일본여행에서 가장 부러웠던 건 아무렇지 않게 현대 속에 스며든 일본의 전통문화들이다. 그곳에 가야만 느낄 수 있는 어떤 특별함이 세계의 사람들을 일본으로 불러들이는 저력이 아닌가 싶다. 유구한 역사로 치자면 우리가 그들보다 못한 게 무언가. 과거를 바라보는 시선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소한 하나라도 옛 것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과 옛 것은 무조건 낡은 것으로 치부하는 인식의 차이가 문제다. 전통의 탄탄한 정체성 위에 현재의 새로움을 덧입히는 방법을 우린 왜 모색하지 못하는 건지.
역사와 문화의 힘이 재화로 환산되어 국가 경제에도 영향력을 미치는 시대다. 동유럽 신생국 크로아티아의 경우 관광으로 벌어들이는 외화가 한해 국민 총생산의 20%를 차지한다고 들었다. 선조가 물려준 있는 그대로의 유산을 발판삼아 관광대국으로 급부상하는 이 나라와 비교해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많이 개선되었다 해도 전통을 낡고 고루한 것으로 여기는 그릇된 인식은 여전하다. 근대화를 내세워 선진국 무조건 따라하기에 열을 올리던 날들을 생각하면 우리 것에 대한 자긍심이 너무 박약했음을 통감한다.
그나마 조금씩 의식이 변화해가는 것에 기대를 걸어본다. 북촌과 서촌의 골목길, 전주의 한옥마을, 군산의 근대문물 거리, 통영의 비탈진 언덕길. 전국 곳곳에 산재한 옛 골목길을 찾아 나서는 이들을 보자. 이젠 지나간 걸 낡은 것으로만 바라보진 않는다. 따뜻하게 보듬어야 할 우리 삶의 흔적으로, 아련한 추억의 장소로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의 생활문화를 인정하고 끌어안는 좋은 청신호가 아닐까.
피맛골 유적지 위로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이 머문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피맛골의 흔적을 이렇게라도 간직하게 되어 다행이다. 수많은 관광자원 중에서도 가장 고급한 자원은 시간이 만들어준 문화자원이다. 이 골목의 어제는 지워졌지만 현대화의 옷을 갈아입고 새로운 역사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피맛골의 내일이 희망적이기를 바라며 광화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