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길목이다.
봄이라는 글자가 줄곧 입안에서 맴돈다.
설렘과 두근거림, 기다림의 봄.
또 봄이 시작되나 보다.
이 무렵이면 늘 '봄비'라는 시가 생각난다.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엔
종달새만 무어라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그러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피어오르것다
국어교과서에 실렸던 이수복 시인의 시다. 국어란 학과목을 좋아했지만 시에는 별 감흥이 없었다. 봄비라는 이 시는 좀 특별했는지 오래도록 내 마음 속에 남았다. 특히나 봄이 시작되는 이맘 때면 시를 배우던 때의 소소한 풍경들과 함께 더욱 생각나곤 한다.
춘삼월, 헐렁한 교복을 입곤 우쭐대며 집을 나섰다. 엄마는 왜 그렇게 큰 교복을 만들어 주신 건지. 삯바느질로 살림살이를 꾸려온 엄마는 교복이며 체육복이며 모두 손수 만들어 주셨다. 그 교복은 3학년이 되어서도 헐렁했으니 내가 얼만큼이나 더 클 걸 예상하셨는지 모를 일이다.
앳된 티도 안 벗은 열 네살 애송이에 불과했음에도 제법 덩치가 컸던 탓에 딴에는 어른스런 척을 했다. 키만 훌쩍 컸지 머릿속엔 철딱서니 없는 생각들로 꽉 찼음에도 말이다. 그런데 생각이 부쩍 자라는 것이 느껴지는 게 그 시점이기도 했다. 아잇적과는 사뭇 다르게 다가오는 봄이라는 계절감. 뭔가 변한 것 같은 주변의 모든 것들이 세세하게 의식에 다가섰다. 중학생이 되던 해의 첫 봄, 조금씩 아이에서 청소년기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었다.
봄비라는 시를 수업시간에 배우며 그런 느낌들이 시작된 거 같다. 시어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이전과는 다른 어떤 한 지점을 지나가고 있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은 서글픈 감정이 가미된 설명할 수 없는 정서. 아마도 처녀애들, 임, 향연, 이런 단어가 주는 심각함에 푹 빠졌던 모양이다. 동화와 동시의 세계에서 소설과 시의 세계로 막 들어서던 그 또래의 혼돈이 내게도 다가왔다. 봄비라는 시와 함께 선명한 거라곤 아무 것도 없는 사춘기 소녀의 불안정 속으로 들어섰던 것이다.
봄비란 시를 좋아해서 봄비라는 닉네임을 포털이나 커뮤니티에서 사용하고 있다. 사람들은 장난삼아 가수 박인수의 봄비를 좋아하냐고 묻는다. 또 대놓고 노래까지 부르며 놀리기도 한다. 극구 시를 좋아해서라고 설명해도 웃으며 놀리곤 한다.
한가로운 서울 변두리의 중학교였던 그 학교는 지금은 남녀 공학으로 바뀌고 학교 앞 삼거리는 번화가로 변했다. 몇 해 전 일부러 찾아간 모교는 너무나 달라져 내가 머물던 그 공간이 아니었다. 변한 건 나 또한 마찬가지니 무얼 더 아쉬워하랴.
모든 추억은 있는 그대로 인지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대로 재구성 된다고 한다. 시, 봄비에 대한 나의 기억은 내가 좋아하는 대로 재구성 되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설사 추억은 그렇다하더라도 나의 닉네임 봄비에 만큼은 작고 강한 바람이 담겨있다. 그 시를 처음 읽었던 열 네살 첫 봄의 마음을 간직하고픈 작지만 강렬한 내 소망. 봄비란 시를 기억하는 한 나는 어설펐던 그 봄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나의 기대와 그리움이 담긴 두 번째 이름, 봄비가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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