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독일인의 사랑

정진숙 2017. 4. 2. 19:54

한동안 책 선물을 열심히 했던 적이 있다.
읽었던 작품 중 좋았던 내용의 책이나 읽고 싶었던 책들 중 구입해서 먼저 읽고는 선물하곤 했다.
요사이는 독서를 즐기는 이가 흔치 않아 그런 경우는 드물다.
그래도 내가 가진 책을 누군가가 필요로 한다면 선뜻 건네주기도 한다.
독일인의 사랑, 산우 한분에게 선물하기 전에 
마치 헤어짐의 예의라도 차리는양 한 번 더 읽는다.
아름다운 두 영혼의 사랑이야기가 여전히 애틋하게 다가온다.
   
프리드리히 막스 밀러가 일생 단 한편 쓴 이 소설은 시대를 넘어서는 고전이 되었다.
첫사랑의 로망, 청춘의 스테디셀러가 된 사랑이야기.
이 소설을 무척 좋아한다며 십대 사춘기인 우리에게 소개해준 선생님이 계셨다.
훤칠한 키에 잘 생긴 서양배우처럼 이목구비가 뚜렷한 여중학교 총각선생님
전 학년을 통틀어 모두가 선망하며 바라보던 국어선생님이셨다.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독일인의 사랑을 들려주시던 그 모습이 그려진다.
2학년 때 옆 반 담임을 맡으셨는데 
수업이 끝나면 우린 괜스레 어슬렁거리며 옆 교실을 기웃대곤 했었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책과의 만남에도 시절인연이 있는 것 같다.
만나고자 애써도 결코 만나지지 않고
만나고자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만나게 된다는
시절 따라 만나고 헤어지는 인연의 때.
독일인의 사랑, 내겐 이 책에 그런 시절인연이 있다.

책을 읽을 기회는 쉽사리 오지 않았다.
그 무렵엔 빌려보기에 귀하기도 했고 사서 보기엔 형편이 어렵기도 했다.
정작 책을 살 여유가 되고서도 차일피일 미루었다.
서점에 갈 적마다 들었다 놓았다 반복하며 다음으로 미루곤 했으니
그 소설은 책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던 듯하다.
아마도 조금 더 아껴두고픈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봄날의 교실에서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들려주시던 멋쟁이 국어선생님의 기억을
좀 더 오래도록 붙들어두고픈 맘이 간절해서가 아니었을지. 
   
안개 속 풍경처럼 아득한 그때를 돌이키게 만든 계기가 있었다.
몇 해 전에 어느 TV방송국 다큐 프로에서 선생님을 우연히 뵈었던 것이다.
교육과 관련된 내용이었는데 영국의 교육시스템을 말하는 인터뷰 장면에서
놀랍게도 그 선생님이 클로즈업 되어 화면에 나오신 것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자막의 성함으로 보아 국어선생님이 분명했다.
내 눈이 잘못된 건가. 
수 십 년의 세월이 믿기지 않을 만큼 선생님은 옛 모습 그대로셨다. 
영어를 부전공으로 이수한 선생님은 영어과목도 동시에 강의 하셨는데
인터뷰 당시엔 교육부 파견관으로 영국에서 근무하고 계셨다.
이렇게라도 다시 뵙는구나 하는 반가움과 함께 꼭 읽어보라던 그 소설이 생각났다.
그 책은 그 선생님과 그 시절의 일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상징물 같았다.
이제 막 제대하고 첫 부임한 총각선생님의 푸른 시절과 
앳된 십대 우리들의 모습을 동시에 불러오는 지니의 마술 램프 같다고나 할까.
코끝이 찡해지며 그때 생각에 젖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 일이 있고도 한참을 지나 이 소설을 읽게 되었다.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깊이 있는 철학서이기도 한 작품
맑고 정갈한 문체로 전하는 스토리는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시대와 국경을 넘어 세계인의 마음을 울리는 명작이란 칭송에 헛됨이 없었다.
다만 나는 이 소설을 제법 늦은 나이에 보게됨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겼다.
적절한 인연의 때에 만나게 된 것에 감사할 정도로.
아마 한창 감수성 예민할 무렵 보았더라면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소설의 감성에서 헤어나기가 쉽지 않았을 거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흐른 후의 만남은 얼마나 큰 반가움이었는지.  
만나야 할 때 마주했던 맑은 영혼들의 이야기를 다시 만나며 또 설렌다.
일곱 번의 회상과 마지막 추억을 담은 <독일인의 사랑>
끝나지 않을 그 사랑 이야기를 이제는 떠나보낼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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