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순천 여행/ 20170314

정진숙 2017. 4. 22. 10:45

우리는 어떤 기대를 안고 여행을 떠나는가. 설렘과 기대, 위로와 안식, 즐거움과 낭만. 많은 것들을 여행 안에 품고서 부푼 맘으로 길을 나서곤 한다. 여행지란 장소가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이다, 라고 헨리 밀러는 말했다. 그렇다면 정작 우리가 찾아나서야 하는 건 여행지가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인지도 모른다.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기 위한 교통수단은 여러 가지가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빠르고 편한 길을 택할 것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은 여행지로 가는 방법에도 해당한다. 목적지로 가기 위해 우린 밤기차를 타기로 했다. 이 선택은 여행을 더욱 다채롭게 만들었다. 교통편을 달리한 작은 변화가 새로운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만드는 효과를 준 것이다.

 

새벽 3시 반 순천역 앞 국밥집에서 시작된 긴 하루. 동행들과의 관계가 어떠하든 함께한 시간들은 의미있고 즐겁다. 여명 속에 바라본 순천의 거리들, 아랫장, 웃장, 문화거리, 청수골 둘레길. 새로운 길을 걸으며 새 경험들을 쌓은 새벽이다.

 

우리의 여행은 출발한 곳으로 돌아와 그곳을 재발견할 때 끝난다, 고 T.S.엘리엇은 말한다. 단지 돌아왔다는 것에서 여행은 끝나는 게 아니라 내가 돌아온 곳의 의미가 무엇인지 새삼 깨달을 때 그제야 비로소 여행을 마치게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여행지에서의 느낌과 경험들이 내 삶의 반경 안에서 무언가로 새로이 작용할 때 여행은 끝나는 게 아니라 다시 시작되는 것이 아닐지. 오랜 시간이 주는 사람사이의 편안함을 아무렇지 않게 여겼던 오류를 찾아내는 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그런 결속감이 무척 중요했음을 발견해내는 일, 함께 떠난 여행에서 서로를 돌아보고 관계를 다시 규정하게 되는 일 등등은 충분히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

 

뭐니뭐니 해도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드라마촬영장이었다. 볼 게 뭐 있겠어, 하며 들어선 드라마세트장. 활짝 문 열린 옛날식 고고장에서 익숙한 팝송이 신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래 전 사라진 것을 만난 반가움.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가는 동화 속 아이들이 이렇지 않았을까. 무언가에 홀린 듯 들어선 실내엔 사이키 조명이 돌아가고 있다. 멀건 대낮에 철부지마냥 고고춤을 추는 중년 아주머니들. 우린 한바탕 신명을 돋우고는 모두 박장대소를 한다.

 

생태도시 순천이 자랑하는 순천만습지나 국가정원에서가 아닌 생각지 못한 곳에서 뜻밖의 감동을 만났다. 딱 그때 그시절로 되돌아간 느낌. 그 무엇이 우릴 몰입하게 만들었을까. 무의식 속 흥겨움의 기억이 아무 거부감 없이 감상에 빠져들게 하지 않았을까.

다양한 미래를 여는 건 풍성한 과거의 기억들이다. 지나간 날의 경험은 내 어딘가에 꼭꼭 숨어있다가 예상치 못한 어느 순간에 불쑥 드러나 위력을 발휘한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잊어야할 것이 아니라 새롭게 복기해야할 자산이다. 기억은 과거의 것만이 아니고 미래를 형성하기 위한 필수 요소다.

 

살아감의 대부분은 내가 경험한 것의 총합을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여행은 가장 직접적인 경험의 장이다. 지난 여행들에서 어떤 것들을 새롭게 조합해냈는지,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와 어떤 의미들을 재발견했는지는 명확하게 구분지을 수 없다. 그러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많은 것들이 일상에 녹아들어 알게 모르게 내 행동에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게 쌓인 경험과 기억들이 나를 이루었을 것이다.

 

순천 여행, 기억의 한켠을 차지한 이들과 한 장소의 기억을 공유한 여행이다. 지난 시간을 들여다보며 현재를 새로 규정하는 여행, 우리의 여행은 늘 다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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