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빽 투 더 퓨처

정진숙 2017. 5. 5. 11:41

 

 

 

 

 

 

 

어느 쪽 방향으로 가야할지 대략 난감하다. 동인천역 개찰구를 나서며 길을 제대로 잡지 못해 한참을 망설인다. 낯설다는 건 소소한 두려움과 더불어 미세한 설렘을 동시에 선사한다. 어수선한 거리, 낡은 지하상가, 스산해 보이는 노점들. 두리번거리는 시선만큼 마음도 갈피를 못 잡은 채 선뜻 목적지로 향하지 못하고 역 근처를 배회한다.

 

오랜 소도시를 연상시키는 역사주변은 십년 전과 매한가지다. 상점이 모두 문을 닫은 어둑한 지하도를 지나 중앙시장을 관통한다. 도로를 사이에 둔 길 건너의 송현시장을 바라보며 걸었다. 인접한 곳에 큰 시장이 둘인 걸로 보아 제법 번성한 동네임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런데도 도무지 2017년이란 시간적 배경이 믿기지 않는 시장통 풍경. 더디게 흐르는 동인천의 생경한 시공간이 신기할 뿐이다.

 

무척이나 낯선 거리에서 덜컥 겁이 났다고 하면 웃을 일일까. 배다리마을 헌책방거리로 가는 방향을 결국 묻고야 말았다. 길을 에둘러 가느라 잠깐 헤맸지만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배다리 전통거리가 있었다. 일부러 남겨두려 애쓰지 않았다면 이렇게 옛날 그대로일 수가 있을까 싶게 그 거리는 너무나 예스러웠다. 초등학교 때 내가 살던 50년 전 서울 변두리가 꼭 이랬을 거다. 타일 외벽의 이층건물들이 버젓이 도로 옆에 당당하게 서있다. 왜 이런 남루한 풍경 앞에서 가슴이 콩닥거리는지 모르겠다. 향수, 연민, 잃어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 이런 촌스런 감정들이 턱 밑까지 복받쳐온다.

 

인천시 동구 금곡동과 창영동 일대를 일컫는 배다리는 작은 배들이 다리 아래까지 드나들어 배다리라 불리게 되었다. 이 곳은 120년 전 개항장인 제물포항을 통해 근대 문물이 들어오는 길목이기도 했다. 제물포에서 일본인, 중국인에게 밀려난 조선인이 거주한 마을이자, 해방 이후 밀려든 서민들이 삶의 터전을 일군 곳이다. 서구 선진 문물이 들어와 가장 빠르게 근대화된 배다리마을에는 성냥공장과 양조공장, 쌀 상회가 많았다. 해방이 되고 일본인과 외국인이 떠나면서 버려진 책들이 여기로 모여들었다. 자연스럽게 헌책방거리가 조성된 것은 1950~1960년대로 그 시절에는 40개에 달하는 헌책방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여섯 곳만 남아 그 명맥을 잇고 있다.

 

한때 배다리 헌책방거리는 서울 청계천과 부산 보수동의 헌책방거리와 함께 전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유명세를 누리기도 했다. 시절이 변해 헌책 뿐 아니라 새 책조차도 냉대받는 터이니 이 거리의 쇠락은 피하지 못할 시대 변화의 한 과정일 듯도 싶다.

 

"사실 과거의 것을 잃었다는 것보다는 생존과 성공 이외의 가치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일지도 모른다. 3대, 5대에 걸쳐 60년째 같은 곳에서 같은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는 식당보다는, 조금만 장사가 잘돼도 금방 프랜차이즈 사업으로 확장하는 사례가 더 많은 걸 봐도 알 수 있다. 한국에서 지켜야 할 맛은 항상 돈보다 뒷전이다... 이처럼 지킬 게 없는 우리 사회는 초고속 스피드 시대와 잘 어울린다. 당장 돈이 되지 않는 무형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생존과 성공을 포기할까 말까를 망설이는 심리적 갈등은 별로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한국 사회는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다. 언제든지 잘되는 쪽으로 바꿔 탈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은 무지하게 생명력이 길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존과 물질적 성취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무엇이든지 버릴 준비가 되어있다. 그래서 한국 사회는 지난 60여 년간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잘살 것 같다. 최소한 물질적으로는….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살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지키고 싶은 게 생기기 마련이다. 더 중요한 건 생활이 풍요로워질수록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옛 가치를 추구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허태균, 어쩌다 한국인)

 

사회심리학자 허태균의 글처럼 이런 옛 가치를 추구하는 문화현상은 우리 사회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낡고 오랜 것들이 전하는 감성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이런 시점이 도래하기까지 남겨진 게 그리 많지 않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배다리 전통거리의 의미는 그래서 더 크게 다가온다. 낡은 것의 가치가 반드시 소멸해야할 불필요한 것만은 아니란 걸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최근 종영된 인기드라마 <도깨비>의 무대로 한미서점이 조명되며 그 진가를 알린 배다리 헌책방거리. 빽 투 더 퓨처, 미래에서 막 도착한 과거의 그 거리가 반갑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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