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 / 정희재

정진숙 2017. 5. 12. 13:27

아주 오랜만에 마음 달구는 글들을 만났다.

공감하다 못해 풀썩 주저앉게 만드는 글의 마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정희재작가의 감성에세이, <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

제목에서부터 마음을 홀리는 책이다.

그녀의 삶도 무척 신산했음이 서른 한 꼭지의 글 안에 가득하다.

그래서 더욱 다가오는 내면의 잔잔한 부침들

가장 특별할 수도 어쩌면 가장 보편적일 수도 있는 작가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로, 우리의 이야기로 스며든다.

맑은 감성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능력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재능이 아님을

그녀의 글에서 읽을 수 있다.

모두가 다 같이 사용하는 한국어로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을 엮을 수 있음이 부럽다.

 

그녀의 잘 다듬어진 글을 읽으며 구멍 숭숭 뚫린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구깃구깃 한구석에 팽개쳐두었던 감정의 찌꺼기들을 휘적거리며

빠져나가지 못하고 내 안에서 앙금이 된 어줍지 않은 사연들을 뒤늦게 펼쳐보았다.

 

"함부로 쏜 화살.

젊은 날의 치기를 비유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이 있을까. 그 화살은 타인을 향해서도 발사됐지만, 그보다 더 자주, 더 깊이 스스로의 가슴에 꽂히는 일이 많았다.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그림자마저 미워지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그때는 불타는 세상의 화염에 화상을 입었다고 생각했지만, 나야말로 그 불꽃을 키우는 기름의 일부였음을 이제는 안다. 돌이켜 보니 당신이 옳았고, 내가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옳았고, 당신이 틀렸다는 말도 아니다. 애초부터 옳고 그름은 없었다. 그저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 하는 감정에 따라 혼자만의 법정에서 유죄, 무죄를 따졌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나는 편안해졌다, 고 감히 말하진 못한다. 다만 이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부분에 약하고 어떤 부분에 강한지, 무엇에 가슴 뛰고 무엇에 좌절하는지 조금 알게 되었을 뿐이다. 이해하게 됐을 뿐이다.”

 

페이지 마다 넘치는 명문들 중 유독 이 문장에서 마음이 서걱거린다.

보듬고 사랑하기보다 할퀴고 미워한 시간들이 많았음을 나또한 이제야 조금 알게 되었으니.

상처가 나야 치유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지금에야 이해하게 되었으니.

 

히말라야 오지를 두루 주유한 그녀의 이력에 막 시샘이 나던 찰나

그녀가 들려주는 이 말은 얼마나 큰 위안인가.

 

“여행지에서 버스와 기차, 비행기가 몇 시간 또는 며칠 연착되는 일은 너무 많아 다 기록할 수도 없다. 불편함이 일상이 된 곳에서 서울로 돌아왔을 때 어떤 의미에서 이 거대 도시는 하나의 축복이었다. 몇 달만 지내다 보면 다시 이곳을 못마땅해 하고 저주할 테지만, 적어도 여행에서 이제 막 돌아온 신참 귀환자에겐 문명의 모든 혜택이 기적처럼 다가왔다. 인도 여행에서 만난 어느 독일인 여행자의 말이 생각난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 깨끗하고 푹신한 이불로 몸을 감싸고 잠들 때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바로 그 순간을 맛보기 위해, 내 집을 다시 사랑하기 위해 자꾸 여행을 떠나는 것 같아요.”

 

우리의 여행은 출발한 곳으로 돌아와 그곳을 재발견할 때 끝난다는 T.S 엘리엇의 말과도 통하는 얘기였다.

 

“결국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였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에서 행복할 수 없다면 세상 그 어느 곳을 가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로 괴로웠던 날을 지나온 지 오래다.

알 수 없는 열망으로 가슴 뻐근했던 그런 날들을

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 로 그녀가 마구 흔들어 깨운다.

그리곤 당신도 그땐 힘들었을 거라 토닥이며 위로를 건넨다.

 

"살아 보니 행복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것이었다.

행복에 관한 한, 우리는 일용직 신세였다. 비정규직이었다.

내일 몫까지 미리 쌓아 두기 힘든 것, 그게 행복이었다.

 

냉정하고 불공평한 세상 탓만은 아니었다.

스스로 행복의 기준이 늘 바뀌기에

오래 행복을 붙잡아 둘 수 없었던 것.

 

현인들은 말한다.

“세상이 이만큼이라도 유지되는 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행복의 정규직이 되지 못한 건

누가 방해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한 결과였다.

 

행복에 대해 겸허해지기로 했다.

드릴 기도라곤 오직 “감사합니다”뿐임을 깨닫자

더 자주 행복해졌다.

다음 날 벌어 다시 따뜻해지면 되니까."

그녀의 야무진 결론으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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