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결코 부드럽지 않은 '카스테라' / 박민규

정진숙 2018. 1. 6. 20:26
타임스퀘어 1층 8번 출입문을 열고 소공원 방향으로 나섰다.
그러자 예상치 못한 낯익은 건물이 눈앞에 나타난다. 

예전에(이젠 예전이라고 해야겠다) 신세계 백화점에서 경방섬유 쪽으로 내려다보면 빨간 벽돌의 낡은 건물이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을씨년스런 외형이 왠지 영등포의 쓸쓸한 뒷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경방섬유와 경방필 백화점이 사라진 자리에 타임스퀘어가 들어서고 일 년이 조금 더 지났나 보다. 
당연히 없어졌거니 하였던 건물이 내 눈앞에 떡하니 나타난 것이다. 
근처에 있음에도 늘 다니는 곳만 드나들던 터라 이제야 그 건물을 이리로 옮겨 복원한 사실을 알게 된다. 
말쑥하게 다듬어져 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출입문 앞에 카페 <나무그늘>이라고 적혀 있다.
전시 중인 그림과 책을 커피와 더불어 즐길 수 있는 북 카페였다. 
입구 바로 옆에, 이 건물은 1936년 지은 경성방직의 옛 사옥이며 서울시 사적으로 지정되었다는 문구의 입간판이 서 있다. 
그랬구나, 이 얼마나 황홀한 변신인가.
사라져 묻힐 뻔한 역사 하나와 이렇게 만나다니 반가울 따름이다. 
삶의 현장이었던 이 곳을 멋드러진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 시킨 누군가의 안목이 고마웠다. 

<나무그늘>에서 박민규의 '카스테라'와 운 좋게 만났다.
햇살이 드는 창가에 앉아 여유로움과 함께 단편집 '카스테라' 펼쳤다. 
첫 만남의 소감은 편안하게 책장을 넘기다 느닷없이 한방 맞은 듯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 시대의 소설이 이만큼 진화하고 있구나 싶었다. 
'카스테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처럼 결코 말랑말랑하거나 촉촉하지 않았다.
한동안 고전읽기에 빠져 있던 내게 박민규는 생경함으로 다가온다. 
'전생이 훌리건이던 냉장고'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아, 하세요 펠리칸'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몰라몰라 개복치라니'......
그의 상상력은 기발하다고 말할 도리 밖에 없다.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 감히 아프다는 말조차 버거운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 
그는 인물이 처한 현재의 상황을 빌어 자신이 하려는 말을 대변하게 한다. 

독특하게 풀어가는 그만의 표현 방식과 문체는 익숙하지 않은 것이 주는 싱싱함이 있다.
각 단편의 생뚱맞은 전개가 당혹스러운가 하면 한편으로 엉뚱 발랄한 소재들이 이질감과 기대감을 동시에 맛보게 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긴장감, 온 우주를 넘나드는 작가의 분방함이 때론 낯설다.
그럼에도 껄끄럽지 않은 해학이 강한 이끌림으로 책장을 넘기게 했다.
사위어 가던 옛 건물의 놀라운 환생 만큼이나 박민규의 돌발적인 작품에서 새로운 발견의 기쁨을 얻는다.
'대한민국 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신선하고 충격적인 사건 하나를 지목하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박민규라는 작가의 출현을 지목하겠다.' 라고 소설가 이외수는 평한다.
박민규의 개성과 역량은 여러 차례 문학상을 수상한 경력으로 이미 인정받고 있다. 
스스로를 '무규칙 이종 소설가'라 칭하는 작가.
책을 덮는 순간, 어쩌면 그와 친해질 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엄습했다. (201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