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국화도 풍경

정진숙 2017. 6. 23. 00:51

섬은 아주 자그마했다. 국화도라는 이름처럼 소박하고 아담하다. 배가 닿는 T자형 선착장은 당황스러울 만큼 단출하다. 노랑 등대와 짧은 방파제 끝의 빨간색 간이 등대. 배를 접안할 수 있게 만든 약식 선착장과 바다에 닿은 가파른 계단 등이 여느 섬의 풍광과는 사뭇 다르다.

 

4,50호에 불과한 가구 수, 섬 주민의 대부분은 수산업과 민박업에 종사하고 있다. 하절기 성수기엔 섬에서 기거하다가 겨울 한철은 외지로 나가 지내고 봄이면 다시 들어오는 주민도 상당수다. 우리가 묵은 민박집 주인 네도 그런 경우였다. 바튼 언덕 위에 자리한 이집은 허술한 판넬로 지은 가건물처럼 보였다. 부엌을 겸한 거실에 세면실이 딸려 있고 방 하나가 전부다. 마당 앞으로 바다가 마주보이는 게 가장 큰 자랑이자 제일 큰 영업 전략인 민박집. 작은 섬에 어울리는 이런 허름함에 외려 정감이 간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이 작은 섬의 고립감은 은근하게 압박감을 준다. 무엇하나 구속받을 건 없음에도 왠지 자유롭지 못한 느낌. 이미 몸에 젖을 대로 젖어버린 편리의 부재가 문제였다. 물은 나오다가 끊기기를 반복하고 소소한 생필품을 구할 수 있는 편의점은 문을 연 곳이 전무하다. 도시적 편리함이 주는 구속력을 잘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왔음을 알게 된다.

 

점심 먹고 딱히 할 일도 없어 해변으로 나가본다.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세월을 낚는 아버지와 남동생, 무슨 재밀까 싶다. 낚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취미다. 초여름의 싱싱한 바다내음을 맡으며 바위벽에 붙은 고동이랑 소라를 딴다. 연로한 어머니도 이럴 땐 신명이 나신다. 힘든 줄 모르고 연신 허릴 굽혀 고동을 따시는 걸 보면 아직 마음은 소녀 같다. 물고기는 낚일 낌새도 안 보이는데 아버지와 남동생은 자릴 걷을 생각이 없다. 어머니와 여동생 우리 내외만 국화도 옆 매박섬으로 향해 걷는다.

 

본섬과 길게 나란한 매박섬과 도지섬은 물때에 맞춰 하루 두 번 바닷길이 열리는 무인도다. 들고 나는 밀물과 썰물에 닫히고 열리는 바닷길을 따라 울퉁불퉁한 돌 위를 걷는다. 기껏해야 세 시간이면 섬 한바퀴를 다 돌아볼 수 있는 어린왕자의 소행성 같은 섬, 국화도.

 

바다를 사이에 두고 바로 지척에 육지가 보인다. 우뚝 솟은 당진발전소와 제철소의 긴 굴뚝이 섬의 한가로움과는 강한 대조를 이루며 묘한 조합을 만들어낸다. 서너 시간 전 장고항에 닿기까지 크고 작은 공단을 스쳐지날 때의 풍경들이 떠오른다. 철조망담장 옆에 핀 붉은 장미의 긴 행렬이 어울리지 않는 소품처럼 이질적으로 보였다. 바다를 막은 석문방조제의 끝이 보이지 않는 직선이 한순간 두렵게 느껴지기도 했다. 바다를 메워 육지를 만든 사람의 힘. 인간은 자연에 얼마나 더 큰 도전장을 내밀는지.

 

소음 잦아든 바다풍경은 적막하다. 외로움, 무료함, 섬이 주는 이미지들이 방금 떠나온 나의 일상과 부조화를 이룬다. 할 일 없음이 이렇게 버거울 줄이야. 참을 수 없는 심심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익숙하지 않은 느린 시간들. 섬은 내게 무료함이 얼마나 참기 힘든 건지 깨닫게 만든다.

 

무인도를 거닐다 국화도 해변으로 다시 돌아왔다. 아버지는 아직도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계셨다. 정지된 풍경 속에서 잡히지 않는 세월을 낚으며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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