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여행 둘째 날은 카미자카 전망대, 만제키바시, 토요타마 와타즈미 신사, 한국전망대, 미우다 해변을 둘러보았다. 그 중 우리에겐 안타까운 장소인 만제키세토를 바라보며 마음 착잡했다. 상대마와 하대마를 나누는 운하 만제키세토는 일본의 동아시아 세력 확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러일전쟁 승리의 전초기지였다. 대마도의 가장 홀쭉한 지형에 개착한 이 인공운하는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전멸시킨 쓰시마 해전의 1등 공신이다. 결과적으로 1905년 러일전쟁 승리 이후 일본의 대륙침략은 본격화되었고 조선은 뼈아픈 을사늑약의 치욕을 겪는다. 그런 기막힌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둘로 나눠진 섬을 잇는 선홍색의 다리 만제키바시 아래로 바다는 무심하게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이틀간의 일정에서 그 무엇보다도 참담한 기분이 들었던 곳은 금석성터 안에 세워진 덕혜옹주 결혼봉축비 앞에서였다. 정략결혼의 희생자인 덕혜의 입장에서 일제가 주모한 그 결혼이 과연 축복받을 일이었을까. 이왕가 종백작가 어결혼 봉축기념비라니, 대마도에 사는 우리 교민들이 세운 기념비라는 게 부끄럽다. 더구나 1955년 이혼 당시 뽑아버렸던 봉축비를 한국 관광객이 늘어나자 2001년 들어 이 자리에 다시 옮겨 세웠다니 왠지 놀림당하는 기분이다. 그런 기념비를 우린 관광이라고 둘러보고 있으니 이 무슨 아이러니한 상황인지.
불편했던 여정 중에도 와타즈미 신사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바다와 뭍이 만나는 경계에 서 있는 도리이는 신비로운 느낌마저 들게 했다. 해궁과 용왕 전설이 담긴 이곳의 일본 천왕가 신화는 우리의 난생신화와도 유사하다. 대부분의 신사가 동쪽이나 남쪽을 향하는데 비해 와타즈미 신사가 바라보는 방향은 서쪽이라고 한다. 그 서쪽 끝에는 김수로왕의 가야가 있었다. 와타즈미 신사가 있는 니이 지방은 유례없이 많은 우리 조상들의 유물이 출토된 곳이다. 신사 입구에는 돌조각 고마이누(고려견)상이 있다. 남섬 이즈하라의 시라기야마(신라산), 북섬의 고마야마(고려산) 등 지명의 어원이나 여러 사료적 정황으로 보아 신사의 주인은 삼국시대의 한국인이었을 거라는 추정이 있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가까운 대마도에는 고대부터 한국인이 건너가 살았다. 馬韓(마한)과 마주보는 땅이라 하여 우리 선조는「對馬島」로 명명하였다. 세종대왕은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의 왜구를 토벌하고 경상도에 예속시켰다. 以白山爲頭 大嶺爲脊 嶺南之對馬 湖南之耽羅 爲兩趾(이백산위두 대령위척 영남지대마 호남지탐라 위양지, 백두산은 머리고 대관령은 척추며 영남의 대마와 호남의 탐라를 양발로 삼는다) 이 글귀는 1750년대 영조 연간에 제작된 보물 제 1591호 ‘해동지도’에 있는 글귀다. 우리의 옛 지도뿐만 아니라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제작한 ‘조선팔도총도’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그려져 있고 대마도가 경상도에 속해 그려져 있다. 1786년 일본인이 만든 ‘삼국접양지도’(하야시시헤이 제작, 프랑스어판)에도 독도와 대마도는 분명하게 우리 영토로 표기되어 있다. 1830년 일본에서 만든 ‘조선국도’에도 울릉도와 독도, 대마도가 분명하게 조선 영토로 나타나 있다.
이에 대한 증거들은 수없이 발굴되고 있다. 영국에서 활동하였던 이태리인 지리학자 J.H. 커놋이 1790년에 작성한 '일본과 한국'이라는 지도에도 독도뿐만 아니고 대마도가 한국 영토로 그려져 있다. 이 지도에는 독도와 울릉도, 대마도가 "STRAIT OF COREA"로 표시되어 있고 특히 관할 국가의 경계를 표시하는 지도의 바탕 색깔을 한국 본토와 같은 황색으로 나타내 이 섬들이 한국령이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표시했다.
이외에도 국제공인지도, 1756년 일본지리학자 모리고안이 에도시대 막부의 명으로 제작해 공인 받은 '대마여지도' 등등 대마도가 우리 땅이었음을 증명하는 기록들이 수없이 많다고 한다. 일본은 이런 사실들이 계속 드러나는 것을 차단하고 우리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역사를 왜곡해가며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끊임없이 의도적인 시비를 걸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 현재도 천왕가와 관련된 대마도의 신사에선 노골적인 역사 왜곡이 자행되고 있다. 첫날 들렀던 하치만구(팔번궁)신사 진구왕후의 신화가 그렇다. 진구왕후는 15대 일왕 오진을 임신한 몸으로 삼한을 정벌하여 그곳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진구왕후가 삼한을 정복한 후 신라를 침공해 신라의 왕인 파사 이사금에게 항복을 받았다는 시기는 역사적 시점이 일치하지도 않는다. 확인되지 않은 낭설과 이미 폐기된 학설인 임나일본부설을 들먹이며 아직도 역사를 왜곡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우리나라와의 역사적인 얽힘만 없었다면 원시적인 아름다움을 잘 간직한 대마도의 자연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카미자카 전망대에서 바라본 이곳의 리아스식 해안풍경은 우리의 다도해와 흡사하다. 시화인 이팝나무의 분포나 야마네코라 불리는 산고양이 삵, 고려꿩 등은 일본 본토에서는 찾기 힘든 종이라 한다. 시원스럽게 쭉쭉 뻗은 편백나무 숲을 스쳐 지나며 오래도록 조선 땅이라 표기되었던 섬을 바라보는 심정은 안타까웠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일본에서 발행한 지도에서조차 대마도는 조선 땅으로 표기되었다는데 그 섬이 지금은 일본 땅이다. 광복 후 이승만 정권에서 60여 차례 대마도 반환을 요구한 적이 있었으나 유야무야 사라진 옛일이 되고 말았다. 역사가 어디쯤에서 꼬였던 것일까. 세기 말의 혼란함을 틈타 대마도를 은근슬쩍 나가사키현에 편입시키곤 종전시점에 반환하지 않은 섬. 국경의 섬이니 뭐니 선수 치는 일본에게 몇몇 국회의원과 일부 자치단체에서 우리 땅이라고 우기는 게 되레 민망할 만큼 대마도는 문화적으로 일본 일색인 섬이 되고 말았다. 독도를 다케시마라 명하고 어림 턱도 없는 영토주장을 하는 일본에게 이참에 대마도는 우리 땅이라 되받아치는 건 어떨까.
대마도에서 마주한 몇몇 역사 앞에서 얼마 전 타계한 일본의 기록 작가 '하야시 에이다이'의 말을 되새겨보았다. "역사의 교훈을 배우지 않는 민족은 결국 자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끊임없이 침략의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을 향해 자국에서 비국민이라 외면 받은 그가 생전에 했던 말이다. 하야시 에이다이는 우리가 하지 못한 힘든 일을 대신해준 고마운 일본 지식인이다. 84세에 생을 마감한 노작가는 강제 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찾아 기록하고 알리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올해 8월 일생동안 수집한 육천 여점의 조선인 강제동원 자료들을 우리 정부 국가기록원에 기증했다. 군함도에 관한 그의 사진은 최근 상영한 영화 군함도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그의 말대로 자멸의 길을 걷지 않기 위해선 뼈아픈 역사의 교훈에서 반드시 배워야 한다. 비록 부끄러운 역사일망정 같은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잊지 말고 기억해야만 하지 않을까.
그저 한 번쯤 가보아야 할 곳이라고 가볍게 여겼던 대마도다. 이틀간의 짧은 일정이지만 무거운 마음으로 배우고 공부하는 여행이 되었다. 현재는 살아온 날의 결과물이며 내일은 오늘을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다. 대마도의 어제와 오늘을 아울러 돌아보며 역사는 강자의 편이라는 걸 절실하게 느낀다. 빼앗긴 걸 억울해만할 게 아니라 잘 지키기 위해선 스스로 강해지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쉽게 풀리지 않는 화두 하나를 품고 우리의 바다 대한해협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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