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5도를 오르내리는 한파가 삼일 째 이어진다. 오랜 만의 추위가 힘들기는커녕 왠지 반갑다. 꽁꽁 언 손을 호호거리며 발을 동동 구르던 시절이 언제던가. 추워서 얼어 죽겠다느니 어쩌니 해도 겨울은 매섭게 추워야 제 맛이다.
얼지 말라고 수돗물을 졸졸 틀어놓고 살 때는 한해 겨울나기가 녹록치 않았다. 문풍지 사이로 밤새 스민 북풍에 머리맡 자리끼가 아침이면 얼어붙곤 했었다. 코끝이 발개지도록 우풍 서늘한 방안에서 옹기종기 둘러앉아 아랫목 이불 속에 발을 녹이던 겨울날, 다시 돌아다보니 그때 정경이 참 따뜻하게 그려진다. 이젠 다 지난 일들이라 그런 거겠지.
여고 1학년이 끝나갈 무렵이었던 것 같다. 새벽 6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일찌감치 내리던 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있었다. 제 시간에 등교하기도 빠듯한데 눈은 점점 더 심하게 내렸다. 학교를 가기 위해 남한산성 끝자락의 단대동 종점에서 239번 버스를 탔다. 복정동을 거쳐 헌인릉 앞을 지나고 역삼동을 향하는 동안 버스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더니 급기야는 말죽거리 근처 언덕에서 아예 멈춰서고 만다.
더 이상 갈 수 없다며 눈보라 치는 벌판에 승객들을 모두 내리라 하고는 을지로까지 가야 할 버스는 성남으로 무심히 되돌아가고 말았다. 지금이야 그 일대가 도심이나 마찬가지지만 그땐 논밭뿐인 허허벌판이었다. 학교가 있는 종로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려면 최소한 영동시장 앞까지는 갔어야 하는데 어째야 할지 막막했다.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집으로 되돌아가거나 걸어서 역삼동 고개를 넘어 버스를 갈아타거나 둘 중 하나였다. 결석은 안 된다는 한 가지 생각만 떠올랐다. 시린 두 손을 번갈아 호호거리며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눈밭으로 변한 도로 위를 걷고 또 걸었다. 단발머리 위엔 눈이 쌓여 녹아내리고 녹은 눈은 다시 얼어 머리카락 끝엔 딱딱한 고드름이 매달렸다.
너무 춥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고, 눈물이 쏟아지는 걸 꾹꾹 참아가며 걸었다. 흰 눈 펑펑 내리는 겨울 아침 비슷한 몰골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진 영동대로를 상상해보라. 기도 안차는 그 난리 북새통 속에서 한 시간을 넘게 걸어 신사동 사거리에 도착했다. 이미 버스를 기다리는 몇 줄의 사람들로 정거장은 대만원이다. 어렵게 차 한 대가 오면 꽉꽉 채워 떠나기를 몇 차례, 남산터널을 지나 무교동으로 가는 14번 버스를 간신히 얻어 탈 수 있었다.
황당한 건 그 다음 일이다. 원래의 노선을 벗어나 제 맘대로 가는 기사님께, 아니 이 버스 어디로 가는 거예요, 하고 사람들이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저도 몰라요. 갈 수 있는 길로 시내로 가는 중이예요, 였다. 이럴 수가 있나. 오늘 안에 학교엔 갈 수 있으려나.
눈길이라 비탈진 남산터널로 진입하지 못한 노선버스는 한남동을 겨우겨우 넘어 장충동에서 동대문 앞을 지나고 청계천을 지나 무교동 버스정거장에 드디어 섰다. 속이 타다 못해 새까매진 나는 숨도 제대로 못 고르고 학교를 향해 뒤뚱거리며 빙판 진 길을 뛰었다.
조마조마 교실 앞에 당도한 시각은 4교시 수업 중간. 빠끔히 안을 들여다보며 뒷문을 살짝 열었다. 나를 향해 일제히 쏠리는 시선들, 이제 죽었구나 싶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애먼 교실 바닥만 쳐다보며 주춤거리는 사이 믿기지 않게 우렁찬 박수소리가 들린다. 출석률 백 프로인 우리 1학년 1반 마지막 용사에게 박수를! 담임 선생님의 목소리다. 때마침 정치경제 과목을 담당하신 담임의 수업시간이었다. 선생님은 내게 진심으로 장하다 칭찬하셨다. 성남에서 통학하는 걸 알고계시기에 당연히 못 올 줄 알았다고 하신다. 멀고 먼 눈길을 용케 잘 왔다며 어깨도 토닥여주셨다.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이면 문득 떠오르는 고생스런 날의 기억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만사 잘 극복하고 사는 걸 보면 아마도 이 무렵부터 의지의 한국인 기질이 내겐 있었나 보다. 오늘은 내가 살아온 어제의 결과이고 내일은 내가 사는 오늘의 모습으로 정해진다고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열심히 살고 있으니 내일 또한 탈 없이 잘 살지 않을까. 날은 춥지만 마음 따뜻해지는 추억으로 행복한 오늘이다. (정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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