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사 가는 길 / 김규진

정진숙 2018. 10. 12. 19:42

눈발에 가려

實相은 보이지 않고

지나온 발자욱 역시 눈에 가리웠으므로

나는 어디에 와 있는지 알지 못한다.

 

實相은 어디 있는가.

바람은 바삐바삐 지나가 버리고

눈을 쓴 댓잎의 손가락은 너무 많아

그 방향을 가늠할 수는 없다.

 

實相은 어디 있는가.

한 발 한 발 찍은 생각들은

거친 눈보라로 날려가 버리고

어쩌다 손바닥 위에 놓인 생각들은

눈처럼 녹아버려

그 온기를 잡을 수 없다.

 

實相은 정말 있는가.

눈발에 가려

實相은 보이지 않고

흰 눈에 갇혀

눈감은 것처럼 어두운 저녁.

마음의 집을 허물어 버리고

절 한 채를 들여놓는다.

(김규진 시 ‘실상사 가는 길1’ 전문)

 

이상했다.

논밭 사이 너른 평지에

마치 폐사지의 그것처럼

허허로이 깃든 실상사

 

공연히 쓸쓸했다.

고색창연한 그 절집을 본

처음 느낌이

멀리 천왕봉을 끌어안은

웅혼함을

도무지 눈치채지 못했다.

 

세 번쯤이었나.

장대비 지나간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실상사의 고적함에

괜스레 주눅들었다.

감히 무어라 말하기 힘든

긴 침묵만

절집에 그득했다.

 

내겐 그랬다.

그후로도

비 온 뒤의 고요만을 보았던

때문인지

그저 쓸쓸함 가득한 절이거니

 

구름 속에 잠긴

지리산의 영봉들을 한 번도

마주한 적 없이

경내에 고인 고요만을

보았기에

실상사의 실상을 아직

만나지 못했거니

 

그래서이다.

늘 그리웠던 건

 

나는

만날 수 있을까.

본적 없는

그 실상을

 

대웅전 시선 머무는

끝자락에

턱하니 버티고 있을

그 실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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