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발에 가려
實相은 보이지 않고
지나온 발자욱 역시 눈에 가리웠으므로
나는 어디에 와 있는지 알지 못한다.
實相은 어디 있는가.
바람은 바삐바삐 지나가 버리고
눈을 쓴 댓잎의 손가락은 너무 많아
그 방향을 가늠할 수는 없다.
實相은 어디 있는가.
한 발 한 발 찍은 생각들은
거친 눈보라로 날려가 버리고
어쩌다 손바닥 위에 놓인 생각들은
눈처럼 녹아버려
그 온기를 잡을 수 없다.
實相은 정말 있는가.
눈발에 가려
實相은 보이지 않고
흰 눈에 갇혀
눈감은 것처럼 어두운 저녁.
마음의 집을 허물어 버리고
절 한 채를 들여놓는다.
(김규진 시 ‘실상사 가는 길1’ 전문)
이상했다.
논밭 사이 너른 평지에
마치 폐사지의 그것처럼
허허로이 깃든 실상사
공연히 쓸쓸했다.
고색창연한 그 절집을 본
처음 느낌이
멀리 천왕봉을 끌어안은
웅혼함을
도무지 눈치채지 못했다.
세 번쯤이었나.
장대비 지나간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실상사의 고적함에
괜스레 주눅들었다.
감히 무어라 말하기 힘든
긴 침묵만
절집에 그득했다.
내겐 그랬다.
그후로도
비 온 뒤의 고요만을 보았던
때문인지
그저 쓸쓸함 가득한 절이거니
구름 속에 잠긴
지리산의 영봉들을 한 번도
마주한 적 없이
경내에 고인 고요만을
보았기에
실상사의 실상을 아직
만나지 못했거니
그래서이다.
늘 그리웠던 건
나는
만날 수 있을까.
본적 없는
그 실상을
대웅전 시선 머무는
끝자락에
턱하니 버티고 있을
그 실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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