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기억 저편의 흔적

정진숙 2016. 11. 10. 17:50

 

 

 오랜 기억들을 재구성하는 것만큼 가슴 두근거리는 게 있을까.

 이미 지나간 것들을 지금에서 확인하려 함은 어쩌면 무의미한 시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인간의 정체성은 그가 지닌 경험과 기억의 총체이기에 나를 이루어온 것들을 눈으로 확인하고픈 생각이 간절했다. 사진 한 장에서 시작된 이 여행은 가물가물하던 과거를 지금에 재연해내려는 노정이다. 어린 시절의 결핍을 온전히 메우는 일이기도 하다.

 잘려나간 지 한참인 나의 일부에서 지금도 어떤 통증이 느껴지는 것 같은 환상통, 사라진 날들로부터 전해지는 그런 헛통증에서 벗어나고도 싶었다. 부산행 기차에 마음을 싣는다. 옆도 뒤도 안 보고 앞으로만 내달리는 좀비처럼 하나의 강박에 묶여 어제를 향해 달려간다. 수원역에서 새벽 기차를 타고 12시 무렵 부산역에 도착했다. 점심도 거른 채 옛 기억 행으로 가는 시내버스에 다시 올랐다.

 범일동 성남초등학교 앞에서 시작된 유년으로의 회귀. 섬처럼 고립된 매축지마을엔 신기 하리 만큼 어린 시절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설마 남았을까 했던 옛날이 이 동네에 고스란히 고여 있었다. 학교 가는 길에 지나던 시장 옆 굴다리, 철로 변 담벼락과 좁은 골목길, 허물어지고 낡은 판잣집들이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가슴 한켠이 뻐근해지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사라졌더라면 다시 못 보았을 이 풍경 앞에서.

 한 걸음 폭의 골목길을 걷는 내내 익숙한 공기가 코끝을 스친다. 어느 순간 감지된 바닷내음, 정체모를 내 향수병의 원인은 이 바닷내음 때문이었다. 47년의 간극을 이어주는 묘한 기시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큰 도로 옆에 빼곡한 냉동 창고 건물들, 물류창고들, 그 너머의 부두, 익숙한 공기를 품은 바람이 부두에서 골목으로 불어오고 있었다. 새로 지은 고층아파트와 매축지 마을 사이 길이 끝나는 지점에 고가도로가 보인다. 그 고가는 내가 이 골목에 살 무렵 완공되었다. 공사를 막 끝낸 빈 고가 위는 여름 밤 아이들과 손잡고 노래 부르고 뛰놀던 우리의 놀이터였다. 부두에서 불어오던 그때의 바닷바람은 참 시원했었다.

 철길 위로 놓인 육교에 오르자 널찍한 경부선 철로가 발아래 있다. 허술한 나무담장을 넘어 들어가 따끈한 선로에 귀를 대며 위험한 놀이를 일삼던 아찔한 아홉 살. 인생 중반을 지나서 이제, 그 시절의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때와 지금의 나를 이어주는 건 같은 이름과 기억뿐이다.

 나는 왜 이곳을 그토록 그리워했을까. 이상하리만치 많은 공간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단 일 년을 살았던 것치곤 너무도 생생하다. 분명 버거운 시간을 보냈을 곳임에도 말이다. 아마 힘든 건 모두 소멸되고 좋은 것만 무의식에 잠재되었나 보다. 어쩌면 영악스런 무의식의 메커니즘이 이기적 선택을 했을 수도 있겠다. 눈에 보이는 객관적인 공간 이외의 외면하고픈 것들에 대해선 본능적으로 망각이라는 선택을 한 것인지도.

 이곳의 삶이 아직 나의 현실이라면 과연 이곳을 좋아했을까 반문해본다. 결사코 벗어나려 몸부림쳤을 것이다. 현재진행형이 아니라 오래 전 지나온 과거완료형이기에 이 골목에서 보낸 날들을 애틋하게 간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골목길을 돌아서 왔던 길을 한 번 더 걷는다. 무겁던 짐 하나를 내려놓은 듯 홀가분한 기분이다. 반세기의 긴 시간이 무색하게 아무렇지 않은 듯 발걸음은 길 건너 자성대를 오르고 있다. 먼 발치로 바라보던 부두의 큰 배들은 무성해진 나무숲에 가려 잘 보이질 않는다.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영초윗길 산복도로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부산역을 향한다. 이른 아침 햇살을 받은 까꼬막 동네는 살아감의 고달픔이라곤 느낄 수 없는 정갈한 풍경을 보여준다. 333번 버스는 부산항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조망 좋은 산허리 길을 아슬아슬하게 달리며 내려간다. 부산역 앞에서 전포동 가는 차로 갈아탔다. 설렘으로 조급해진 내 맘과는 달리 서면을 지나 전포동 가는 길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성북초등학교 뒤 높은 산이 가끔씩 생각나곤 했다. 가파른 골목을 벗어나면 큰 길이 나오고 학교담장을 따라 조금 더 걸으면 교문이 나왔다. 그런데, 그렇게 오랫동안 그려왔건만. 도무지 옛 흔적이라곤 찾을 수 없고 낯선 곳을 헤매는 기분이다. 꼭 일 년을 다녔던 초등학교만이 그 자리에 있었다. 지금 후문으로 사용되는 문이 정문이었던 게 분명한데 동네가 너무나 변해버려 옛 기억을 복원해낼 수가 없다. 교문 아래 큰길은 온통 아파트촌이고 골목의 아주 일부만 남았다.

 내 기억 저편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건 학교 뒤로 보이는 큰 산이 전부였다. 교정은 이미 달라져 버렸고 아침 햇살을 받으며 턱 버티고선 이 산의 느낌만 그때처럼 선명하다. 혹시 동네 위치를 잘못 알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학교 아래 골목길을 샅샅이 살펴보고 지하도를 지나 맞은 편 골목까지 구석구석 둘러보았다. 아무리 떠올려 봐도 연결되지 않는 생소한 공간들이다. 괜스레 마음만 갑갑해진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몇 번을 돌아보며 골목을 빠져나온다. 고가도로 너머 길 건너에 초고층 금융센터 건물이 눈에 띈다. 가난한 달동네에서 번화가로 변모한 옛 동네, 내가 찾지 못한 수 십 년 사이 전포동은 이렇게 달려져 있었다. 그나마 저 산을 허물지 않고 남겨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어제 범일동 매축지마을에 이어 오늘 아침 전포동까지. 무의식 어딘 가에 가라앉았던 무채색의 기억들을 꺼내 지금의 색감으로 바라보았다. 어두웠던 풍경 안에서 다시 울적해 할 일은 없을 듯하다. 겉으로 드러내 물끄러미 바라본 그 흔적들이 나를 편안하게 놓아준다. 오래도록 나를 묶었던 무언가에서 풀려났다. 이젠 아무 때건 웃음 머금고 지나간 날을 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여리고 약했던 아이, 어린 날의 내가 비로소 그 골목길을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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