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한국의 길

섬진강 탐매와 구례 산수유 기행

정진숙 2016. 12. 31. 00:38

 

 

 

 

 

 

 

 

 

 

 

 

 

 

 

 

새벽 4시, 남녘의 봄밤이 제법 싸늘하다.

아직 깜깜한 첫새벽에 광양매화마을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일명 대포 카메라를 목에 건 사진작가들이 청매실 농원 일출 출사를 나온 것이다. 우리도 우리지만 정말 부지런한 대한민국 사람들이다.

새벽하늘 북두칠성이 머리 위 바로 눈앞에 걸려있다. 매실농원 언덕길을 오르는 것이 마치 북두칠성을 향해 걷는 것처럼 별이 가까이 느껴진다. 이 언덕 끝에 올라서면 저 별들이 손끝에 닿을 듯하다. 지난밤 내린 봄비에 촉촉이 젖은 매화 향기가 온 산을 가득히 매웠다. 백운산 능선 위 맑은 별빛과 그윽한 매화꽃향기. 온 몸에 하얀 봄밤의 향기가 스며든다.

 

언덕에 서서 해 뜨는 곳을 바라본다. 멈춘 듯이 고요히 흐르는 섬진강이 코앞에 있다. 보이는 모든 게 수묵화 한 폭이다. 그림 속 오른쪽 끝에서 안개폭포가 천천히 흘러내린다. 서서히 피어오르는 물안개는 산과 마을을 작은 섬으로 만든다. 부드러운 회색빛이 번져가는 섬진강의 몽환적인 아침. 정지 된 무채색 풍경위로 연분홍 해가 수줍게 고개를 내민다. 매화꽃 하얗게 흩뿌려 논 동산 너머 유영하듯 흐르는 안개 사이로 완벽한 원으로 떠오르는 말간 분홍빛깔의 해. 이건 현실의 풍경이 아니다. 우린 환상 속 아침을 맞았다.

 

섬진강의 느릿한 곡선을 조망하기 위해 매화랜드로 자릴 옮긴다. 가파른 길 꼭대기, 정자에 오르자 맞은 편 마을의 산자락이 더욱 다정하게 다가섰다. 아래서 바라보던 모습과는 또 다른 정감. 커다랗게 에스자 곡선을 그리며 섬진강 물길은 흐르고 있다. 양편의 언덕 곳곳에 들어선 아기자기한 마을들이 예쁘다. 좋은 감상을 위해 좋은 자릴 찾아다니는 인솔자의 마음을 알게 된다.

 

구례 산동마을엔 산수유축제가 열렸다. 오늘이 첫 날이라 그런지 들어가는 입구부터 번잡하다. 일 년에 한 번뿐인 꽃 때인데 이만큼의 번잡은 불만일 것도 없다. 절기에 맞춰 누리고 사는 것도 어쩌면 잘 사는 방법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으로 넘치는 반곡마을을 지나 상위마을로 간다. 아랫마을 보단 조금 더 여유롭다. 산수유 만발한 이끼 긴 돌담사이로 걸으며 지리산 고리봉을 바라본다. 구례의 가장 큰 자산은 어디서 건 든든한 배경이 되는 지리산자락들이다. 위협하지 않고 늘 편안하게 감싸주는 너그러운 산. 이 고장에 사는 이들은 어머니 같은 이 산을 언제라도 바라볼 수 있는 복을 누린다.

 

반곡마을 계곡은 인산인해다. 노랗게 벙그러진 산수유 꽃 사이로 사람들의 즐거운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좋다. 흐릿한 겨울풍경을 제일 먼저 환하게 밝히는 노란색의 향연, 봄이 시작되는 신호가 이 꽃이니 반갑지 않을 리 없다. 꽃맞이 봄맞이를 하러나온 사람들의 마음이 즐겁지 않을 리가 없다. 봄꽃이 만발한 세상, 봄놀이라도 할 수 있는 이만큼의 여유가 그저 감사하다. 매일매일 봄의 즐거움이 만발한 날이면 좋겠다.

시절 따라 봄을 즐기고 계절 따라 변해가는 산야를 느끼는, 그런 시간을 갖는 것이 일상에 매여 열심히 사는 중에 가끔 필요하지 않을까. 봄날은 짧다. 봄이 다 가기 전 온전히 봄날을 만끽할 일이다.<2016.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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