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대성골의 겨울밤은 서늘하다. 음력 대보름 전, 휘영청 밝은 열사흘 달이 중천에 떠있다. 덕평능선 위로 북두칠성이 선명하게 박혀있고 오리온은 남쪽을 향해 이울고 있다.
나는 왜 저 달과 별을 홀로 바라보는 걸까. 우린 왜 아득한 이 밤에 대성골의 물소리를 듣고 있을까. 지리산을 찾아온 제각각의 이유는 다를지라도 어둠 속 하염없이 흐르는 저 계곡물소리는 깊은 울림으로 모두에게 스민다.
군불 땐 대성주막집 방안에서 부용산가 일 창과 이성부 시인의 지리산 시 두 편을 낭송하고 한껏 흥에 취한 우리는 잠시 피 끓던 날의 청춘이 되어본다. 급기야 원대성골을 향해 야심한 달밤 길을 자청한 이들. 후박나무 하얀 수피가 길 밝힌 산길을 따라 한 발 한 발 어둠속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네들은 지리산에 깃든 침묵을 온전히 느끼고 올 것이다. 지리산 골짜기 골짜기에 묻힌 가까이 하기 버거운 지난 역사들. 우린 언제쯤 편한 눈으로 그 시간들을 돌아볼 수 있을지. 대성골의 밤은 달빛에 젖어 고요히 저물어 가고 있다. 혼자 되돌아 선 나는 민박집 툇마루에 앉아 계곡을 가득 채우는 물소리를 듣는다.
새벽 6시 동트기 전 대성골을 떠나 의신으로 내려온다. 연암난야라 쓰인 현판이 걸린 도현스님의 거처 연암토굴에 당도했다. 스님은 동안거 해제법어에 참석키 위해 쌍계사로 내려가신 이후라 뵙질 못한다. 볕 좋은 명당 터에 서서 맞은편 지리남부능선을 바라보았다. 번뇌없이 무심하게 바라볼 수 있는 이 풍광을 앞마당에 둔 이는 얼마나 큰 마음의 부자인가.
이후부터는 두 개 팀으로 나뉘어서 산행을 진행한다. 현대사의 명암을 돌아보게 될 빗점골 산행 팀과 서산대사길 트레킹 팀. 욕심을 부려 빗점골행을 택하고도 싶지만 4년 전의 여운을 그대로 간직하고픈 마음으로 트레킹 팀에 합류한다.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더라도 지리산이 주는 감동은 어디서건 여전하리라.
작년 이맘때 걸었던 서산대사길의 느낌이 참 좋았다. 화개천 맑은 계곡을 끼고 천천히 걷는 숲길. 거친 산길과는 다르게 편안함과 여유로움이 있는 길이다. 의신에서 신흥마을까지 4.2키로의 지리산 옛길. 조금씩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산길을, 급할 것 없는 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보면 저절로 맑아지는 기분이 든다.
한 두시간 남짓 걸어 신흥마을에 도착했다. 칠불사로 가는 이들과 헤어져 화개장터로 향했다. 하동은 해마다 봄이면 꼭 한번은 찾는 나만의 힐링 장소다. 쌍계사 십리벚꽃길을 지나 화개장터로 간다. 검은 나뭇가지만 무성한 벚나무 고목들이 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꽃보다 더 많은 인파로 몸살을 하는 하동의 봄날은 즐겁지만은 않을 것이다. ‘봄비는 오고 지랄이야. 꽃은 또 피고 지랄이야. 이 환한 봄날이 못 견디겠다고. 환장하겠다고...’ 버들치시인 박남준이 이렇게 해마다 한탄을 해도, 봄이 나는 좋다.
옥화주막에서 만나는 섬진강 명물들 앞에 맥 놓고 흐뭇해진다. 재첩국, 재첩파전, 참게게장, 더덕막걸리. 자잘한 즐거움을 늘려가는 것이 행복 아닌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나눈 이들 고마웠다오. 장터 앞 섬진강변에 서서 왕시루봉을 바라보았다. 무심히 보던 그 봉우리가 왕시루봉이란 걸 안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유목민대장님 덕분에 지리산의 봉우리와 골짜기의 이름, 역사를 하나 둘 알게 된다. 누군가의 안목을 넓히는 일은 참 거룩한 일인 것 같다. 비록 원하는 만큼 지리산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일취월장하지 못하더라도 쉼 없이 전하려하는 대장님의 의지에 감사드린다. 그 노력 덕분에 지리산에 묻힌 수많은 이야기들이 우리에게서 또 누군가에게 이어질 것이다.
조금 다른 길에서 서로의 여건에 맞게 지리산을 담은 일정이었다. 현대사의 명암을 돌아보았던 누군가와 이른 봄날의 낭만을 누렸던 누군가에게 모두 의미 있는 길이 되었다. 다음 길에서 그들 모두와 또 만나기를 기약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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