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비 내리는 고모령

정진숙 2018. 2. 12. 11:46

 

썩 잘 부르지 못하는 노래지만 만만한 자리에서 누가 시키기라도 하면 망설임 없이 부르는 노래가 있다.

 

봄날은 간다, 어릴 적부터 엄마가 부르던 걸 따라 흥얼거린 곡이라 3절 가사까지 모두 외우는 몇 안 되는 노래이다. 나긋한 봄날에 재봉틀 앞에 앉아서 삯일을 하실 때면 엄마는 고운 목소리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곤 하셨다. 이미자님의 노래들을 특히 좋아하셨는데 유독 이 노래가 내 기억 속에 남았다.

 

백설희님의 봄날은 간다가 엄마의 18번이라면 아버지의 애창곡은 현인선생의 비 내리는 고모령이다. 이 곡의 배경이 된 고모령은 대구시 수성구에 있는 고모역 근처의 고개라고 한다. 고모역에 가기 위해 넘어야 하는 야트막한 고개. 대구가 고향이신 아버지에겐 이 노래의 가사가 그래서 더 애틋하셨을 것이다. 멋모르던 어린 날에 아버지 따라 무심결에 흥얼거린 이 곡 역시 2절까지 가사를 다 외우는 곡이다.

 

요즘이야 주점이며 음식점이 지천이라 집에서 주안상 차릴 일은 드물지만 예전엔 의례 집으로 친구 분들을 모시고 오는 게 예사였다. 아버지는 술이 어느 정도 거나해져 흥이 돋으면 노래 한 자락 부르곤 하셨다. 그때 부르시던 노래가 이 곡이였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어린 맘에도 왠지 구슬프게 들리던 노래였다.

 

아버지는 다섯 남매 중에 막내시다. 바로 위의 형님은 전쟁 중에 전사하시고 누이 한 분과 두 형님만 살아계셨는데 두 분은 몇 해 전 이미 고인이 되셨다. 어릴 적부터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서인지 아버지는 다른 형제보다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셨다. 고향을 떠나 객지 생활을 오래도록 하시는 동안 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깊으셨던 것 같다. 그 노래 속에는 어머니를 향한 그런 그리움이 담겨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때론 눈물지으며 부르시던 비 내리는 고모령. 아버지의 어머니이신 할머니께서 유난히 예뻐하셨던 나였기에 아버지의 노래가 더더욱 마음 아프게 들렸던 모양이다. 엄마의 그 노래와 아버지의 그 노래를 나의 노래로 부르면서 어느새 내게도 애틋함이 생겨났다.

 

세상 살면서 꿈 없는 청춘을 지나온 사람이 있을까. 꿈 많던 젊은 날, 좋은 시절을 고생하며 사신 부모님의 고단했던 삶에 대한 연민이 지금은 내 노래가 된 그 노래들에 담겨있다. 이제는 황혼의 시간을 사시는 두 분의 젊은 날이 그 노래를 부를 때면 저절로 그려진다. 잘 부르지도 못하는 나의 노래가 가끔은 눈물 나는 절창이 되기도 하는 이유다. (정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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