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책의 숲을 거닐며

정진숙 2019. 4. 30. 13:32

 

얼마 전 관악산 가는 길에 책 두 권을 새로 샀다. 서울대입구역에 마침 애용하는 서점이 있었다. 비록 중고책방이기는 하나 명문대 근처의 서점답게 수준 높은 책들이 서가에 꽂혀 있었다. 잠시 둘러보다가 읽기 편할 듯 보이는 철학서 한권과 헤르만 헤세의 에세이 한권을 구매했다.

 

그 중 한 책인 <독서의 기술, 뜨인돌 2011년판>은 헤세의 수많은 에세이에서 책과 독서에 관한 글만을 추려 편집한 책이다. 첫 장의 시작부터 콕콕 찌르는 문장으로 빼곡하다. 백 년 전의 글에서 육십 여 년 전의 글까지 한 세기의 시차가 난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대부분이 현재적인 내용의 글이었다.

 

"책은 오직 삶으로 이끌어주고 삶에 이바지하고 소용이 될 때에만 가치가 있다."(10p)

너무나 명료한 단언 아닌가. 이 바쁜 세상에 삶에 소용되는 책이 아니라면 무용한 것일 수도 있겠다.

 

다소 까칠한 헤세의 면모가 엿보이는 이 책의 세 번째 챕터에는 서재 대청소라는 글이 있다. 이사를 앞둔 노작가가 서재에서 수천 권의 장서를 손수 정리하며 느낀 소회를 적은 에세이다.

 

헤세는 오래 전 읽고 애장했던 서적들의 쇠락을 오감으로 바라보며 책이 지닌 생명력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지성인의 글이 바로 다음 세대에게 곧바로 잊혀진 사상이 되는가 하면, 반대로 수십 수백 수천 년 묻혔던 글이 시간의 강을 건너 현대에서 빛을 발하기도 하는 책의 놀라운 세계에 대해.

 

그의 심오한 책 예찬론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아버지가 떠올랐다. 약간은 무능한 생활인이었던 아버지는 책 예찬론자였다. 단칸방 한 벽면을 책으로 가득 채워 놓았으니 끼니 걱정이 우선인 엄마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책들은 잦은 이사 때마다 골치거리였다. 많기도 하고 무겁기도 해서 엄마의 단골 잔소리 소재가 되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방학 때마다 아버지는 의례적인 숙제를 내게 안겼다. 창문 위 선반에 꽃힌 책의 먼지를 털어내고 겹겹이 쌓인 책들을 가지런히 정리하라는 어려운 숙제였다. 원목으로 맞춘 튼튼한 선반은 벽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의 긴 선반으로 거의 백 여권이 넘는 책이 꽃혀 있었다.

 

괴테의 파우스트, 단테의 신곡, 셰익스피어 전집, D. H 로렌스의 아들과 연인, 차탈리부인의 사랑,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토마스만의 테스,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 글씨, 스탕달의 적과 흑, 대망, 황순원의 나무들 비탈에 서다, 한국 문학 전집 등등

 

의자 위에 올라서서 폴폴 날리는 먼지에 콜록거리며 책을 정리하다보면 은근히 심통이 났다. 내가 볼 건 하나도 없는데 힘든 일만 시킨다고 볼멘 소리로 투덜거리곤 했다.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 여름방학의 어느 날이다. 어김없이 책장 정리를 맡기고 아버지는 출근하셨다. 땀을 뻘뻘 흘리며 한권 한권 낡은 천으로 닦아내다가 문득 책장을 넘기게 되었다. 무슨 제목의 책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갑자기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랄까. 아, 우리 집에 보물이 가득 있었네 하는 발견의 경이감. 눈앞에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찌릿한 느낌이었다. 청소를 하다말고 한참동안 의자에 걸터앉아 책을 읽었다.

 

"진정한 독자가 울창한 책의 세계에서 길을 잃고 압도될지, 제대로 길을 찾아 자신의 독서체험이 진정으로 경험과 삶에 소용되게끔 만들지는 각자의 지혜나 운에 달려 있다."(23p)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책의 울창한 숲에서 넓은 세계로 가는 길을 다행히도 잘 찾았던 것이다. 살아가는데 책이 꼭 필요한 건 아니다. 필요하다고 해서, 읽기를 강요한다고 해서 제대로 읽게 되는 것도 아니다. 헤세의 에세이를 읽으며 내게 준 아버지의 방학숙제는 자연스럽게 책의 숲으로 이끄는 좋은 길라잡이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책이 낸 길을 잘 따라 왔기에 지금 짧은 글 한줄이나마 쓰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