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에 즈음하면 / 유안진 송년에 즈음하면 도리 없이 인생이 느껴질 뿐입니다 지나온 일 년이 한 생애나 같아지고 울고 웃던 모두가 인생! 한마디로 느낌표일 뿐입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자꾸 작아질 뿐입니다 눈 감기고 귀 닫히고 오그라들고 쪼그라들어 모퉁이길 막돌맹이보다 초라한 본래의 내가 되고 .. 시 2018.12.11
담장을 허물다 / 공광규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살던 백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느티나무 그늘 수십평과 까치.. 시 2018.11.23
내가 사랑하는 계절 / 나태주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달은 11월이다. 더 여유 있게 잡는다면 11월에서 12월 중순까지다 낙엽 져 홀몸으로 서 있는 나무 나무들이 깨금발을 딛고 선 등성이 그 등성이에 햇빛 비쳐 드러난 황토 흙의 알몸을 좋아하는 것이다 황토 흙 속에는 시제時祭 지내러 갔다가 막걸리 두어 잔에.. 시 2018.11.23
11월의 시 / 임영준 모두 떠나는가 텅 빈 하늘아래 추레한 인내만이 선을 긋고 있는데 훌훌 털고 사라지는가 아직도 못다 지핀 시들이 수두룩한데 가랑잎더미로 시름을 떠맡기고 굼뜬 나를 버려둔 채 황급히 떠나야만 하는가 -11월의 시, 임영준 얼마 남지 않은 11월 황급히 떠나가는 계절 가을이 끝났.. 시 2018.11.23
실상사 가는 길 / 김규진 눈발에 가려 實相은 보이지 않고 지나온 발자욱 역시 눈에 가리웠으므로 나는 어디에 와 있는지 알지 못한다. 實相은 어디 있는가. 바람은 바삐바삐 지나가 버리고 눈을 쓴 댓잎의 손가락은 너무 많아 그 방향을 가늠할 수는 없다. 實相은 어디 있는가. 한 발 한 발 찍은 생각들은 .. 시 2018.10.12
나무들 / 이사라 나무 하나는 옆 나무의 존재를 알까 나무 둘은 그 옆 나무의 그림자를 알까 무리를 이루어 살아가면서 나무끼리는 서로를 알아줄까 마침내 여름 숲이 되어서도 나무들이 서로를 알지 못한다면 한 시절을 지나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질 때까지 서로를 기다려보는 것이 나을까 아.. 시 2018.06.22
4월이 오면 / 권영상 4월이 오면 마른 들판을 파랗게 색칠하는 보리처럼 나도 좀 달라져야지 솜사탕처럼 벙그는 살구꽃같이 나도 좀 꿈에 젖어 부풀어 봐야지 봄비 내린 뒷날 개울을 마구 달리는 힘찬 개울물처럼 나도 좀 앞을 향해 달려 봐야지 오, 4월이 오면 좀 산뜻해져야지 참나무 가지에 새로 돋.. 시 2018.03.30
엄마 생각 /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 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 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 시 2018.03.07
떡국 한 그릇 / 박남준 섣달 그믐 어머니의 한숨처럼 눈발은 그치지 않고 대목장이 섰다는 면소재지로 어머니는 돈 몇 푼 쥐어 들고 집을 나서셨다 사고 싶은 것이야 많았겠지요, 가슴 아팠겠지요 섣달 그믐 대목장날 푸줏간도 큰 상점도 먼발치로 구경하고 사과며 동태 둬 마리 대목장을 봐오시네 집에.. 시 2018.02.15
한 겨울의 입춘 / 정연복 겨울의 본색을 드러내는 칼바람 휘몰아쳐 체감온도 영하 20도라는 양력 2월 4일 바로 오늘이 입춘이라니 참 이상하지 않은가 온 세상 추위에 얼어붙고 나무마다 빈 가지뿐 초록빛은 어디에도 없는데 뜬금없이 봄이 왔다니. 아니다! 입춘이 맞다 겨울 지나 봄 오는 게 아니라 겨울 .. 시 2018.02.12